[ISSUE] 산이 <페미니스트>
I am feminist.
난 여자 남자가 동등하다 믿어.
봐, 여잘 먼저 언급했잖아.
엄마 아빠에서 엄마가 먼저 오듯.
지난 16일 래퍼 산이가 공개한 신곡 <페미니스트>의 도입부는 이 유치하고 단순한 문장들로 시작한다. 곡의 화자는 중간중간 “I am feminist”라며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가사 전체가 오히려 ‘여성혐오’에 가깝다. 게다가 곡에서 지적하는 ‘군대’나 ‘꽃뱀’ 논리는 지난 수십 년간 페미니즘을 비판하고 여성의 권리를 지우는 데 지겹도록 동원된 레퍼토리다. 이 진부하고 낡은 이야기를 지금 이 시대에, ‘랩’으로 다시 듣게 될 줄이야.
논란이 되자 산이는 여성혐오가 아니었다며 이 곡의 화자도 자신이 아니라고 슬그머니 한 발 빼기를 시도한다. 하지만 그간의 노래들로 드러난 ‘전적’들과 <페미니스트> 발표에 앞서 ‘이수역 폭행사건’의 여성 측 발언이 담긴 영상을 일방적으로 공개했다는 점을 미루어보면, 이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그 의도가 너무 빤하게 보여서다.
일단 산이가 본인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남성 화자’의 말부터 좀 살펴보자. 너무 낡고 시대착오적인 논리라 더 설명이 필요할까 싶지만, 아닌 건 아닌거니까.
여자와 남자가 현 시점 동등치 않단건 좀 이해 안 돼.
우리 할머니가 그럼 모르겠는데
지금의 너가 뭘 그리 불공평하게 자랐는데.
넌 또 OECD 국가 중 대한민국 남녀 월급 차이가
어쩌구 저쩌구 fxcking fake fact.
우리 할아버지가 이렇게 얘기했어도 ‘팩트체크’는 중요하다. 그러나 <2016년 통계 기준 OECD 국가들의 성별 임금격차 평균이 14.1%인데 반해 한국은 36.7%로 압도적인 1위>이며, 이 기록은 <OECD에서 조사를 시작한 지난 2002년 이래 15년째 계속되고 있다>는 ‘팩트’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여성들이 겪는 차별은 여전히 일상적이다.
야 그렇게 권릴 원하면 왜 군댄 안 가냐.
왜 데이트 할 땐 돈은 왜 내가 내. 뭘 더 바래.
지하철 버스 주차장 자리 다 내줬는데 대체 왜. (중략)
나도 할 말 많아. 남자도 유교사상 가부장제 엄연한 피해자야.
근데 왜. 이걸 내가 만들었어? 내가 그랬어?
Sister why mad? blame system Not men.
여기서도 “군대 안 간 여성은 권리를 이야기하지도 말라”는 해묵은 논리가 등장한다. ‘군대’가 애초에 시민권의 유일한 조건도 아닐뿐더러, 그러는 본인은 정작 군 면제자라는 것도 우습다(아, 본인 아니랬지). 그러면서 “남자도 가부장제의 피해자”라고 주장하는데, 그래서 피해자인 남녀 모두가 같이 부수어야 하는 건 다름 아닌 그 ‘유교사상’과 ‘가부장제’다. ‘여성’이 아니라.
미투 운동 지지해 알지?
김감독, 조배우 개x끼들 땜에 남자들 싸잡아 욕먹지.
솔직히 but 그런 극단적인 상황 말고
합의 아래 관계 갖고 할거 다 하고 왜 미투해?
꽃뱀? 걔넨 좋겠다 몸 팔아 돈 챙겨.
남잔 범죄자 x 같은 법 역차별 참아가며 입 굳게 닫고 사는데.
이 남성 화자는 ‘미투’에 대해서도 ‘일부 남성들의 극단적인 행동’으로 규정짓고 억울함을 토로한다. 이 역시 미투 당시 여성들의 목소리를 억압하고 비난하는 전형적인 논리였다. ‘김감독’과 ‘조배우’가 유명인이어서 상대적으로 더 알려졌을 뿐, 이들의 사례가 결코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며 우리 사회 어디에나 존재했다는 것이 미투 운동으로 드러난 한국 사회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할 거 다 하고 왜 미투해?”라는 이 가사는 피해생존자들에게 “왜 그 땐 가만히 있다가 지금 와서 난리냐”, “무슨 의도가 있는 거 아니냐”며 손가락질 하던 어떤 모습들을 떠올리게 한다.
‘소라넷 스타일’, ‘나쁜 년’ 노래했던 산이의 전적들
사실 산이의 ‘여성혐오’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14년 피처링으로 참여한 릴샴의 곡 <Ride>에는 “I’m speaking to you bitch play that 소라넷 스타일”이라는 가사가 등장한다. 소라넷은 17년간 해외에 서버를 두고 불법촬영물을 유포해 온 음란사이트로 지난 2016년에 폐지됐다. 사이트를 운영하고 불법촬영물을 업로드 한 사람은 물론, 소비하는 것만으로도 ‘범죄’인데 버젓이 ‘소라넷 스타일’이라고 노래한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있었던 지난 2016년에는 <나쁜X>이라는 노래를 발표했다. 노래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나쁜 년’은 표면적으로는 헤어진 전 연인을 가리키고 있지만, 가사를 유추해 보면 박근혜 전 대통령을 뜻한다. 국정농단은 분명한 잘못이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사에 ‘나쁜 년’, ‘병신년’ 등을 사용한 것은 여성비하적 표현이자 분명한 여성혐오였다.
이로써 한 가지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은 산이가 꾸준히 ‘여성혐오’를 해 온 역사적 맥락이 있다는 것이다. <나쁜X>이나 이번 곡 <페미니스트>는 얼핏 사회 이슈를 노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욕과 조롱, 비난으로 점철된 여성혐오만이 있을 뿐이다. 그의 곡들은 자극적인 표현으로 주목을 끄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유효하고 의미 있는 메시지를 담지는 못했다.
‘지금껏 억눌린 여성’을 위한다는 모순된 변명
래퍼 제리케이는 산이의 <페미니스트>가 화제가 된 직후, 디스곡 <NO YOU ARE NOT>을 발표해 공개적으로 반박했다. “CEO, 고위직, 정치인 자리 대신에 지하철, 버스, 주차장 자리로 내는 생색”이라면서 “매일 계속되는 공포는 니 존재보다 확실”하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래퍼 슬릭도 디스곡 <EQUALIST>를 통해 “한 오백만년 전에 하던 소릴 하네“라며 “여성혐오라는 글자마저 오독하는 놈이 여성혐오를 논하는 수준”이라고 일갈했다.
그러자 산이는 제리케이를 향한 디스곡 <6.9cm>를 발표해 다시 반박에 나섰다. 자신의 곡 <페미니스트>는 혐오를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화자로 등장한 남자의 겉과 속 다른 위선과 모순 또 지금껏 억눌린 여성에 관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이후 본인의 SNS를 통해서도 “이 곡은 여성을 혐오하는 곡이 아니”라며 “겉은 페미니스트, 성 평등, 여성을 존중한다 말하지만, 속은 위선적이고 앞뒤도 안 맞는 모순적인 행동으로 여성을 어떻게 해보려는 사람을 비판하는 내용”이라고 재차 해명했다.
하지만 <페미니스트> 속 ‘남성 화자’는 스스로의 모순을 드러낸다기보다 일관되게 여성들의 말과 행동을 비난하는 주체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산이의 변명은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고 산이는 두 곡 모두에서 ‘건강한 페미’와 ‘메갈’, ‘워마드’를 구분 지으면서 이들을 지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곡 전체에서 겨냥하고 있는 대상은 사실 페미니스트 그 자체에 가깝다. 이는 배경과 맥락은 삭제한 채 일부 과격한 언행을 문제 삼아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 전체를 부정해왔던 프레임과도 궤를 같이 한다.
그의 말마따나 “판단은 대중의 몫”이기에 이제와 ‘여성혐오’가 아니라는 해명은 비겁하고 구차하다. 가사 한 구절 한 구절마다 해석을 달아야 할 정도라면 이미 이해와 설득에 실패한 곡이다. ‘관망자’의 입장으로 빠르게 태세전환을 하면서 마치 날카로운 시대비판이라도 하는 것 마냥 으스대지 않기를 바란다. 당신의 과오는 어쭙잖은 변명으로 덮어지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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