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엄마의 지푸라기였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강렬한 기억이 있다. 기억은 아주 잠깐 떠올렸을 뿐인데도 잠시동안 나를 그때 그곳으로 데려다 놓는다. 어른이 된 지금 그때를 떠올려봐도 여전히 어떤 감정이었는지 감정에 이름을 붙이기 어렵다.
아빠가 잘못한 일은 수없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잘못은 엄마에 대한 기만이었다. 아빠는 수차례 바람을 폈다. 아빠의 바람은 이유가 있었을까. 이유가 있었다면 왜 그랬을까. 내가 기억하는 아빠는 엄마를 아주 많이 사랑했다. 아빠와 엄마는 많이 싸웠지만 사이가 좋았던 날들도 많았다. 아빠와 엄마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남편의 바람을 마주한 엄마의 젊은 날들은 어땠을까. 그때의 엄마는 어떤 마음으로 살았을까.
날이 무척 좋았던 어느 날 엄마는 나를 태우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엄마 핸드폰을 내 손에 들고 있었으니 그리 어릴 때는 아니었던 것 같다. 아마도 초등학교 고학년이거나 중학생 무렵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침착하고 차분하게 내게 말했다.
“아빠한테 얼른 전화 걸어봐. 양심이 있으면 딸이 전화하는데 튀어나오겠지. “
엄마의 말에 우리가 지금 아빠를 잡으러 가는 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날의 기억은 어린 내가 감당하기에 정말로 힘든 경험이었다. 아빠가 전화를 받지 않기를 바랐다. 그 순간 그곳에 내가 있는 것이 싫었고 그곳에 나를 데려가는 엄마가 싫었다. 어린 내게 아빠의 바람을 마주하는 것은 아주 힘들고 어려운 감정이었다. 그래서 그날의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내내 마음에 강렬하게 남았는지 모른다.
아빠는 태연하게 전화를 받았고 다른 곳에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날 아빠를 만나지 못했다. 대신 엄마는 아빠가 누구와 어떻게 바람이 났는지 상세하게 말해주었다. 아빠는 도박장에서 돈을 빌려주는 아줌마와 바람이 났다고 했다. 엄마는 이미 만난 적이 있다며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는 다짐도 받았다고 했다. 나이 많고 못생긴 아줌마였는데 되려 엄마에게 "이렇게 예쁜 아내분이 계셨네요"라고 하셨단다. 엄마는 아빠가 고작 그런 아줌마와 바람이 났다는 사실에 화가 난 것 같았다. 엄마의 꾹꾹 눌러 담은 분노를 묵묵히 들었다. 그렇지만 엄마를 이해하기에는 어린 나이였다. 그때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바람난 아빠를 향한 분노도 아니었고 아빠의 바람을 마주 보게 한 엄마에 대한 원망도 아니었다. 그저 혼란스러웠다.
강렬한 기억은 하나 더 있다. 어느 집에 엄마와 함께 찾아갔던 기억이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골목이 굽이굽이 이어진 곳 끝에 있는 단칸방이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이곳에 빚을 독촉하러 온 것이 미안해지는 그런 집이었다. 엄마가 어떤 아줌마를 OO엄마라고 불렀다. 아이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 우리 첫째 아이만큼이나 어린아이가 있었다. 아마도 네다섯 살쯤 되는 아이는 우리가 왜 왔는지 모른채 해맑게 웃고 있었다.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지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나 엄마는 아이 엄마에게 오백만 원을 빌려줬다고 했다. 누가 봐도 지금 당장 이곳에서 돈을 갚아줄 리가 만무했다. 그날의 무거운 분위기를 잊을 수 없다.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엄마와 아이 엄마의 대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돈을 빌린 사람도 돈을 받으러 간 사람도 서로에게 미안해하는 뻘쭘한 분위기였다. 나는 왜 무릎을 꿇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내내 그렇게 앉아있었다. 몇 시간 동안 벌 받는 것 같은 기분으로 엄마 곁을 지켰다. 대화 말미에 엄마가 용기를 낸 듯 차용증을 적어달라고 말했다. 엄마가 애써 힘주어 말하는 것을 느꼈는데 빚 독촉은 엄마에게도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지장까지 찍은 차용증을 받아 집에 돌아오는 길에 왜 나를 이런 곳에 데려온 거냐고 물었다. 엄마는 자식이 있는 걸 보면 미안해서라도 돈을 빨리 갚을 것 같아서라고 말했다. 나는 나보다 훨씬 어린아이가 있고 우리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사는 것 같은 그 집에서 나를 보고 돈을 갚아줄까라고 생각했었다. 그때 나는 그게 전부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엄마의 떨리는 목소리와 간절함이 내게도 전해졌기 때문이다. 엄마에게도 돈을 갚으라는 독촉을 하러 가는 길은 꽤 힘든 일이었다.
엄마는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나를 데려갔다. 아마도 어린 딸이나마 의지가 되었나 보다. 나는 엄마의 지푸라기였다. 지푸라기라도 붙잡아야 하는데 붙잡을 지푸라기가 고작 어린 딸 뿐이었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싶다가도 내게 왜 이런 일들을 경험하게 했을까 싶다. 그래서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 역시 혼란스럽다. 엄마의 분노, 외로움, 두려움을 함께 겪어야 했던 어린 시절의 내가 겪었을 혼란을 그려본다. 여전히 그때의 기억과 정의 내릴 수 없는 감정을 겪으며 엄마를 이해해 보려고 글을 쓴다. 엄마는 내게 무슨 짓을 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