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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 Jul 03. 2024

엄마를 울리고 말았다

그때의 우리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엄마를 떠올리면 늘 억울하다.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는 엄마에게 제발 내 얘기 좀 들어달라고 늘 기회를 엿본다. 엄마에게 하고 싶은 얘기는 어린 시절 상처에 관한 것이다. 내가 상처받았다는 것을 엄마가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인지, 엄마에게 그때 미안했다는 얘기를 듣고 싶은 건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꼭 해결해야 될 인생의 숙제 같아서 나도 모르게 이따금씩 툭툭 말을 꺼내놓는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말을 돌리거나 그때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되받아치곤 한다. 결과를 뻔히 알면서 계속해서 엄마에게 답을 구하려고 한다. 아이를 낳아보니 왜 그렇게 엄마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엄마라는 존재는 한 사람의 인생에 뿌리깊이 자리 잡고 평생에 걸쳐 중요한 순간순간마다 찾게 된다.




엄마는 내가 아이를 낳는 순간 친정엄마 모드로 변환했다. 아이의 탄생과 함께 ’ 친정엄마‘라는 단어도 따라왔다. “친정엄마니까 이런 것도 저런 것도 다 해줘야지"라며 이것저것 챙겨주었다. 엄마는 왠지 모르게 조금 들떠 보였는데 그때는 그런 엄마의 모습이 싫었다. 아이를 핑계 삼아 다시금 나를 삼켜버릴 것 같았다. 내게 엄마의 영향력은 엄청나게 커서 이따금씩 나를 삼켜버리곤 했었다. 엄마의 기분이 내 기분이 되고 엄마의 슬픔이 내 것이 되었던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주는 사랑을 온전히 받을 수 없었던 이유다. 엄마가 주는 사랑은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거부했다.


“미역을 하루에 다섯 번씩 먹어. 그래야 몸에 좋아.”

“매일 미역국만 먹으면 물려서 싫어. 다른 거 먹을래. “


아이를 낳고 늘 이런 식의 대화를 이어갔다. 엄마가 챙겨주는 말과 음식을 한사코 거절하는 것으로 나의 뒤틀린 마음을 들춰냈다. 대화는 늘 평행선이다. 엄마가 주는 사랑과 내가 받고 싶은 사랑은 아주 많이 달랐기에 서로의 마음은 닿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열려있는 마음이 엄마에게만 늘 닫혀있었다.


나는 엄마로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였던 사람에게 엄마의 역할을 뺏어버렸다. 지나치게 독립적이어서 지금도 엄마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잘하지 못한다. 엄마는 ‘이제 내가 아이들에게 필요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외롭고 무기력해졌을 것이다. 엄마가 하는 모든 것에 기를 쓰고 거절했던 날들이 후회된다. 아이를 키워보니 더불어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새삼 깨닫는다.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경험인지 아이를 키우며 더 절실하게 느낀다. 이제라도 엄마의 역할을 인정해 주고 엄마와 도움을 주고받으며 더불어 사는 것을 배워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엄마가 산후조리를 도와주러 우리 집에 머물 때도 엄마의 도움을 맘 편히 받지 못했다. 엄마가 힘들게 요리하고 청소해 주는 것에 고마운 마음보다 불편한 마음을 더 크게 느꼈다. “딸 엄마는 주방에서 죽는다더라”라는 엄마의 농담 섞인 말도 듣기 싫었다. 엄마에게 이제 나를 위한 희생은 그만하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런 불편한 감정으로 엄마를 마주하니 엄마가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마다 "하지 마. 엄마 쉬어"라는 말만 튀어나왔다. 엄마는 계속해서 뭐든 해주려고 하고 나는 뭐든 받지 않으려고 했다.


엄마와 지내던 며칠은 냉온탕을 오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여러 가지 감정들로 마음이 복잡했다. 엄마는 요즘 애 키우기 정말 좋은 세상이라며 오래전 나와 동생을 키우던 시절과 비교해 푸념을 했다.


“우리 때는 똥기저귀를 다 빨아서 키웠는데 참 좋은 세상이야. 똥기저귀 빨다가 어깨가 고장 나서 고생을… 고생을…”


엄마에게 똥기저귀 얘기는 수도 없이 들었다. 나와 동생을 연년생으로 낳아 힘들었던 이야기,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 받았다는 이야기,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우리를 키우며 고생한 이야기는 엄마의 단골 레퍼토리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엄마의 희생에 감사함과 동시에 엄마에게 빚진 마음이 든다. 이런 양가감정이 나를 너무나 혼란스럽게 해서 엄마의 얘기를 듣고 나면 온몸에 힘이 쭉 빠지곤 했다. 엄마는 함께 지내는 동안 틈틈이 엄마의 한을 늘어놓았다. 그때마다 할 수만 있다면 엄마의 한을 풀어주고 싶었지만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얘기만 들어주면 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냥 듣는 것만으로 넘기지 못하는 내가 싫었다. 엄마는 아직도 과거를 산다. 과거에 살지만 지난날은 돌아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 가족은 부모님의 이혼을 경험하며 많이 아팠고 깊이 상처받았다. 엄마도 동생도 나도 모두가 그랬다. 엄청나게 큰 상실을 경험했지만 각자의 상처를 보듬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첫째를 임신했을 때 한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당시 유행하던 ‘금쪽같은 내 새끼’의 어떤 에피소드였는데 이혼가정의 이야기였다. 이혼 후 마음의 문을 닫은 남매와 완벽주의 성향을 가진 엄마에 대한 이야기였다. 예전 우리 가족의 모습과 아주 많이 닮아있는 가족의 이야기라 깊이 공감되었다. 우리가 그때 왜 그렇게 서로에게 날이 서 있었는지 알 것 같아 보는 내내 힘들고 가슴이 저려왔다.


식탁에서 밥을 먹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장면을 보며 참을 수 없는 감정이 올라와 꺽꺽 소리 내며 울었다. 화면 속 가족의 모습과 우리 가족이 오버랩되며 모두의 상처가 너무나 잘 보였다. 각자의 상처는 마음속에 담아두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모습이 꼭 예전의 우리 같았다. 엄마도 동생도 나도 상처를 다루는 방법을 몰랐고 각자의 상처를 핑계 삼아 서로에게 더 상처를 줬다. 그때 서로의 아픔을 알아봐 줬다면 어땠을까.


성인이 되고 엄마는 전주에 남고 동생은 군대에 가고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며 모두 떨어져 살게 되었다. 떨어져 살다 보니 사이가 무척 좋아졌다. 엄마는 그 시절 우리를 빗대어 ‘셋이 똘똘 뭉쳐 살았다’고 표현했는데 정말 그랬다. 엄마가 카드값이 모자라다고 얘기하면 아르바이트비 얼마를 떼어 보내주고 동생은 군인월급으로 어학연수중이던 내게 용돈을 보내주기도 했다. 엄마는 어려운 형편에도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딸에게 매달 월세와 용돈을 보내주었다. 가족 모두가 힘들었지만 서로가 있었기에 힘든 시기를 잘 버텨냈다.


그때의 우리 가족에게 ‘그때 우리 참 힘들었는데.. 지나고 보니 왜 그랬는지 이제 알겠다. 모두가 상처받았었구나. 몰라줘서 미안하고 잘 버텨줘서 고맙고 그런 힘든 날들이 지나고 이제는 우리 가족 많이 행복해졌네’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엄마에게 넌지시 프로그램에 대해 운을 띄우며 함께 보자고 했다. ‘그때 내가 엄마에게 못되게 굴었던 건 나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엄마에게 그때의 나를 이해받고 싶었고 많이 힘들었을 엄마를 위로하고 싶었다.


바람은 곧장 물거품이 되었다. TV를 켠 순간부터 엄마는 표정은 일그러졌고 정말 많이 고통스러워 보였다. 엄마의 그런 표정을 본 건 거의 처음이었다. 엄마는 울기 시작했다. “난 그때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 너무 힘들어" 엄마는 힘들게 입을 떼고 다시 펑펑 울었다. 엄마의 상처는 얼마나 깊은 것일까. 엄마에게 과거는 다시 꺼내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기억이었나 보다.


내가 엄마를 울리고 말았다. 엄마에게 또다시 상처를 줬다. 상처를 줬다는 사실에 나도 상처받았다. ’그저 그때의 우리를 위로하고 싶었던 거라고...’ 하고 싶었던 말을 가슴에 묻었다. 그리고 그 시절 나를 위로해주지 못했다.


마음속 응어리를 풀어버리고 싶은 딸과 지난날의 상처를 돌아보고 싶지 않은 엄마의 창과 방패의 싸움이다. 상처가 깊어 깊숙이 묻어두고 싶은 엄마를 어찌할 도리가 없어 답답하고 한스럽다. 엄마의 상처를 알기에 더 어쩔 수도 없는 나는 글을 쓴다. 엄마를 이해하지만 아직 엄마를 품어낼 자신은 없다. 그래도 언젠가 엄마를 온전히 사랑하고 수용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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