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 관심을 가지며 수집에 대한 열정은 점점 자라만 갔다. 일러스트이긴 하지만 작품 하나를 직접 구입해 집에 두고 보는 즐거움을 맛본 후 호시탐탐 내 형편에 맞는 그림들을 찾는 일에 점차 몰두하기 시작했다.
2011년 교보문고 사건(?) 이후로 풀리지 않는 궁금증을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2015년 예술경영 전공으로 대학원에 진학, 미술시장에 대한 궁금증을 꽤나 많이 해소할 수 있었고, 수업 이외에도 필드 관계자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주워듣다 보니 자연스레 호기심과 열정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그림 이후 새로운 작품을 소유하는 이벤트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불과 몇 년 전이지만 신진급 작가의 그림이 비교적 저렴하게 유통되는 시장 자체가 거의 전무했고, 저렴한 가격이라는 게 그림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 쉽게 가격을 지불할 수 없을 만큼 진입 장벽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어찌 됐건 눈 앞에 좋은 작품이 나타난들 큰 돈을 무리하게 써가며 열정을 채우기는 어려운 상황이었고, 그저 손에 닿지 않는 취미라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에게 아쉬운 마음 뿐이었다.
여행 중 찾아온 우연한 기회
조금 뒤늦게 해외여행의 매력에 빠지던 찰나에, 베트남 다낭으로 잠시 휴가를 다녀올 일이 있었다. 다낭 근교에 있는 호이안이라는 오래된 도시로 다낭을 통해 국내에도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관광 도시이기도 하다. 다낭 숙소에서 하루 종일 누워 있다 택시를 타고 20분 남짓 위치한 호이안에 도착하자마자 여기저기 눈에 많이 띄는 상점들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페인팅 작품을 판매하는 크고 작은 갤러리들이 많음을 알게 됐다.
생각보다 좋은 그림들이 많아 즐거웠던 호이안에서 (2016)
점점 호기심이 발동했다. 가격도 기념품보다 조금 더 비싼 정도로 많이 부담스러운 수준은 아니었다. 조금 값나가는 그림은 수십만 원 선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나름 지역 작가이면서, 큰 도시나 인근 빅 마켓인 싱가포르 등에서 전시 이력이 있을 만큼 활발히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품이었다. (자신의 전시가 소개됐던 신문 기사나 리플릿 등을 증거로 보여주며 자신과 작품을 소개했다.) 물론 일부는 기념품스러운 느낌이 있어 나만의 진주를 찾느라 다른 구경거리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메인 스트리트를 한 바퀴 대충 돌다 작고 낡은 갤러리에서 마음에 드는 그림 한 점을 발견했다. 사이즈가 족히 30호 이상은 되어 보이는데, 다른 기념품스러운 그림과 달리 색채와 인물들의 비장한 느낌이 심플하지만 강렬한 느낌이었다. 뭔가 투박하지만 사이즈도 좋고 볼수록 매력이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사실 사이즈가 있다 보니 아무리 물가가 저렴해도 쉽게 가격을 묻기를 주저했다. 사실 적지 않은 숙소 비용과 경비를 들여서 오다 보니 기념품 같은 무언가에 큰 지출을 할 계획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심스레 가격을 물어봤다.
전혀 다른 의미로 '이 가격이 맞나...?'
사실 많이 놀랐다. 베트남 화폐 단위인 '동'은 숫자 단위가 워낙에 크다 보니 단순히 느끼기에 큰돈처럼 느껴지는 느낌이 있는데, 갤러리 주인에게 가격을 전해 듣고 '역시...' 했다가, 돌아서서는 '가만...'을 속으로 외치며 그 가격의 실제 크기를 머리로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다른 의미로 '이 가격이 맞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비싸기 때문이 아니라 그 반대 이유로...
설명도 잊지 않았다. 본인도 그림을 그리지만 내가 문의했던 그림은 지역 출신 작가의 작품이라는 말, 현재 싱가포르 쪽에서도 개인전을 여는 등 활발히 활동 중이라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그리고는 그 작가에 대해 소개된 신문 기사를 보여 주었다. 사실 보증을 요구할 만큼의 가격 자체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단 아무 부담 없이 그림을 사기로 결정했고, 보증 대신 갤러리 주인이 갖고 있던 기사를 받기로 했다.
액자에서 그림을 분리하는 갤러리 주인, 좋은 그림을 잘 샀다는 얘길 해줬던 기억이 난다.
벽에 걸려 있던 그림이 주인 손에 내려왔고 정성스레 그림을 분리시킨다. 사이즈가 큰 편이라 액자 채로 가져오거나 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고 채색이 묻지 않게 잘 말아서 파이프 통 같은데 담아서 갖고 나왔다.
파이프 통에 담아 온 그림과 함께 인증샷, 아무리 생각해 봐도 뜻밖의 횡재였다.
무언가를 손에 넣었을 때 이처럼 뿌듯하고 짜릿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을까? 생각지도 못하게 여행지에서 큰 사이즈의 그림을 갖게 됐던 이 순간이 지금 생각해봐도 꽤나 감격스럽다. 오랫동안 내가 맘에 들만한 그림을 내가 손 닿을 수 있는 가격에 소유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었는데, 우리나라를 벗어나면 또 이런 기회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얼마인지 이야기 하기는 이상하게 조금 부끄럽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서 들인 실제 표구 값이 그림 값보다 비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은 여전히 가격을 떠나 나에게 큰 의미와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당시 한국에서 신진급 작가 1호 사이즈를 내 돈 내산 하기도 심적으로 부담되던 시절, 큰 사이즈 그림을 소유하며 이 사이즈에 맞는 눈높이가 생겨 버린 점, 이 그림을 계속 즐겨 보게 되면서 새로운 컬렉션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던 점, 거기에 수년간 집 전체의 포인트를 잡아주는 역할을 했던 점 등... 내게는 많은 의미로 다가오는 두 번째 그림이 되었다.
신혼집에서부터 집안의 포인트 역할을 충실히 했던 두 번째 그림 (근데 곧 새 그림에 자리를 내줘야 할 처지...ㅠ)
입문자가 원화를 소유할 수 있는 좋은 방법 : 해외여행지에서 갤러리 찾기!
이때 이후로 여행을 다니면 버릇처럼 여행지의 갤러리를 찾아다니는 습관이 생겼는데, 이처럼 해외로 나가 조금만 정보를 찾으면 당시 나의 감정을 표현하는 그림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할 수 있다. 특히 여행지의 그림은 내가 여행을 떠나온 목적과 동기가 함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더욱 교감신경이 활발히 움직이는 느낌마저 든다. 한국과는 교육과정이나 자라온 배경 등이 다르기 때문에 좀 더 강렬하고 신선하게 다가오는 듯하다.
가격적인 측면에서도 분명 매리트가 있다.(물론 비싼 작품은 어디서든 비싸겠지만) 동남아나 중남미 이런 곳이 아닌 유럽이나 일본 등 시장이 발달한 곳마저도 비교적 낮은 장벽에 만날 수 있는 작품들을 구하는 게 한국보다는 수월한 느낌이 있다.
방콕에서 작가에게 직접 구입한 작품, 당시 내 마음이 그림과 거울 보듯 너무 닮아 았어 눈을 뗄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VATCHARAPONG KANACRUT, 2017)
다만 이 경우 제대로 된 보증서를 받기 어려운 경우들이 있는데, 기왕이면 작가를 직접 만났을 때는 작가의 연락처나 SNS, 기사 등을 검색해 확인하고 작가 혹은 갤러리스트와 함께 사진을 남겨놓는 등의 증거 자료를 남기는 것이 좋다. 물론 작품 그 자체를 순수하게 즐기면 크게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도 있지만, 한 번 연을 맺은 작품과 작가에게 관심을 계속 가지는 것만으로도 컬렉터의 식견을 넓혀 주고, 작품에 더욱 애정을 가질 수 있는 습관이라고 생각한다.
코시국 전까지 매년 1-2회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그렇게 인연이 닿은 작품들이 조금씩 집에 쌓여갔다. 집에 돌아와서 다시 보니 이 당시 여행을 하는 나의 표정과 생각들이 그림 속에 담겨있는 듯한 느낌을 지금도 받는다. 여행지에서 내가 어디를 다니고 무엇을 했는지는 비교적 명확히 기억을 하지만, 여행지에서 만난 그림이 집에 걸려 있지 않았다면 여행을 다니던 당시의 내 생각과 표정, 기분은 어떻게 추억할 수 있었을까... 이런 점들을 생각하면 이렇게 모인 그림들의 가치를 헤아리는 일은 더 이상 무의미한 느낌이다.
고맙게도 이 그림들을 통해 높아만 보이던 국내 미술 시장에도 점차 손을 대도 좋을 담력(?) 같은 게 생겨났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인연이 닿는 많은 작품들을 계속해서 마주하게 됐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