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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Jun 10. 2020

이제는 내 입맛이 으르신인가?

호박잎의 매력을 알아버렸다.

이렇게 무더운 여름엔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개울에 가서 뛰어노는 게 일상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집 앞에 굳건하게 서 있고 내 팔로는 가늠할 수 없는 두께의 아카시아의 꿀을 따먹기도 했던 시절. 그 시절 나는 늦둥이라는 이유로 또래보다 나이 많은 부모님이 조금 창피했다. 가뜩이나 촌 동네인데 할머니 할아버지와 사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그 시절 나는 먹는 음식도 나물, 콩밥 등 집 앞에서 나고 키운 것들로 만들어진 걸 먹고 자랐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나물들을 곧 잘 먹었고 그 시절 아이들이 좋아하는 소시지나 밀가루 햄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고기가 없으면 밥을 못 먹는 게 아니라 계란이랑 김이 없으면 밥을 안 먹었다.


근데 호박잎만큼은 정말 싫었다. 쌈장이나 강된장에 밥을 쓱쓱 비벼서 상추나 깻잎에는 그렇게 잘 싸 먹으면서 호박잎이 식탁에 올라오면 울었다. 할머니 음식이라면서 엄마보고도 이런 거 왜 먹냐며 떼를 썼다.


내 기억의 호박잎의 첫인상은 못생겼는데 입안에서 꺼끌꺼끌하고 축 늘어진 게 그냥 보기 싫었다. 나이 많다고 내비치는 거 같아서 축 늘어지고 꺼끌꺼끌한 게 그 시절 내가 생각하는 어르신들의 모습이어서.

내가 하도 그러니까 어느 순간 식탁에 호박잎이 올라오지 않았고 강된장이 있는 날엔 상추, 깻잎, 양배추만 있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그냥 호박잎이 먹고 싶었다. ‘강된장이나 쌈장에 비빈 밥을 호박잎에 싸 먹으면 맛있겠다.’ 싶었다. 막상 식탁에 놓인 데친 호박잎을 보니 어린 시절 내 모습이 오버랩되어서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이번엔 내가 먹고 싶어서 식탁에 올라온 음식인데 버릴 순 없고 눈 딱 감고 먹어보기로 했다.


역시나 축 늘어진 호박잎 한 장을 손에 올려 잘 핀 다음 강된장에 살짝 비빈 밥 한술을 올리고 한입에 들어갈 수 있도록 쌈을 싸서 그대로 입에 넣었다. 입안에 퍼지는 호박잎 특유의 향과 꺼끌꺼끌함은 여전했다. 참고 계속 씹어봤다. 오물오물 씹다 보니 강된장과 호박잎의 조화로움이 재미있었다. 씁쓸한 호박잎의 맛을 밥과 강된장이 잡아주면서 묘하게 어울렸다.

호박잎으로 다른 요리는 할 수 없을까? 했는데. 엄마는 본인 어린 시절 할머니가 이걸 해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다면서. 한 번 먹어보겠느냐고 권한 음식이 있는데.

된장을 푼 육수에 나박나박 썬 감자를 넣고 한소끔 끓인 후에 돼지감자가루로 반죽해둔 수제비를 띄어 넣고, 먹기 좋은 크기로 손질해둔 호박잎을 넣어 마지막으로 한번 더 끓여내면 엄마표 된장 호박잎 수제비? 호박잎 된장수제비? 가 완성된다.


밀가루는 언제나 옳으니까. 심지어 된장에 푹 익은 감자까지. 수제비 반죽엔 돼지감자가루가 들어가서 더 쫄깃하고 더운 날이지만 연기 풀풀 나는 수제비를 국물과 함께 한 숟갈 떠서 넣으면. 입천장이 데일까 봐 용처럼 입김을 내뱉다 어느 순간 그 호박잎 향이 베인 국물과 된장의 조화와 쫄깃쫄깃한 수제비 때문에 피식 웃음이 난다.


다음엔 호박잎과 감자를 같이 먹어보고, 국물만 따로 먹어보고.이렇게 먹어보고 저렇게 먹어보고. 별로일 줄 알았던 조합이 기대 이상이라 엄마가 왜 자다가 벌떡 일어났지 알 거 같았다.


그리고 이제 엄마가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방 문틈으로 익숙한 그 향이 나면 내가 일어나지 않을까? 눈곱을 겨우 떼고 반쯤 감은 눈으로 후후 불면서 한 숟갈 뜨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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