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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연 Jul 17. 2019

눈물났던 출산휴가 복직기

우리나라 출산율이 낮은 이유

내가 예전에 다녔던 회사는 300여 명의 임직원들이 근무했지만, 우리 부서 빼고는 여자 직원들이 많지 않은 회사였다. 그래서인지 아이를 낳고 회사를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물론 나를 시작으로 지금은 출산휴가와 복직이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됐지만, 그 당시만 해도 조금은 이색적인 풍경처럼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그 때 난 임신을 했지만 그것을 이유로 회사에 조금이라도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야근하고, 주말근무하고, 철야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마 20대의 젊음이 그런 체력을 가능하게 해줬던 같다. 초기에는 매주, 2주, 조금 지나서는 한 달에 한 번 산부인과를 가야했지만 그것으로 인해 조퇴는 꿈도 꾸기 힘들었다. 늘 야근 때문에 평일 저녁에는 가기 힘들었기 때문에, 토요일에만 다녀오곤 했었다.     

 

‘이래서 여자는 뽑으면 안 돼. 출산휴가 가면 그 일은 누가 할 거야? 그래놓고 애 키운다고 제대로 일에 집중 안할 게 뻔해. 또 일할 만 하면 곧 그만두겠지.’     


이렇게 나에게 대놓고 얘기한 사람은 없었지만, 회사의 공기는 자연스레 읽혀졌고 그래서 더 아등바등 ‘좋은 모범’을 보이고자 노력했던 거 같다.      


보세요, 전 임신했지만 여느 남자 직원보다 훨씬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요!’     

이렇게 말이다.  

    

임신 7~8개월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배가 불러오자, 회사의 대표이사는 여직원들을 회의실로 불렀다. 출산휴가와 관련해 서로 논의를 해보자는 것이다. 10여 명의 직원들이 모인 자리였지만, 아직 결혼도 안한 직원들이 많았기에 모두의 시선은 임신해서 배가 불러있는 나에게로 쏠렸다.      


“출산휴가 기간은 얼마나 하는 게 좋겠어? 법정휴가 기간이 지나면 유급은 힘들지 않을까?”     


다양한 논의 끝에 출산휴가는 산전 3개월, 산후 3개월 총 6개월로 정해졌다. 그리고 3개월은 법정휴가 기간이라서 유급이지만, 육아휴직을 적용하지 말고 나머지 3개월은 무급휴가로 진행하기로 정해졌다. 육아휴직을 쓰면 얼마라도 정부에서 지급이 됐지만 각종 절차 등을 회사에서는 아직 적용해보지도 않은데다가, 나도 회사가 번거로움을 감수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 있어서 무급으로 하자고 했다. 돈을 떠나서 6개월의 휴가가 어디란 말인가! 대표님과 팀원들은 아무 걱정 말고 육아휴직을 다녀오라며 다독여주었고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휴가에 들어갔다.     

그렇게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며 느꼈던 것은 집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보다는 회사에서 일하는 게 훨씬 편하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일하는 동안에 어느 정도 내 시간을 나의 계획에 맞춰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출산휴가를 떠날 때와 너무도 달라진 현실

시간이 지나 복직해야 할 날은 점점 다가왔고, 복직을 며칠 앞두고 팀장님에게 연락이 왔다. 복직 전에 일에 대해서 논의도 할 겸 같이 점심식사를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오전에 사무실에 들러 팀 동료들뿐 아니라 다른 직원들과도 인사를 나누고 그간의 소식을 전하고 듣는 유쾌한 시간을 가졌다. 그때 팀장님은 나를 회의실로 조용히 불렀다.


‘점심시간인데, 왜 회의실로 오라고 하지?’    

 

이런 생각도 잠시, 회의실에 가보니 팀장님이 혼자 앉아 계셨다.

그런데 첫마디는 나에겐 충격적이었다.     


“남편 벌이가 안 좋은가 보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갑작스런 질문이 당황스러웠다.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의도가 선명하게 보였다. 난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해보려고, 농담 섞인 말로 응수했다.


“네, 제가 안 벌면 저희 집 생활이 안돼요.”

그러자 팀장님은 작정한 듯이 말했다.


“네가 출산휴가 가면서 네가 하던 일은 다른 직원들이 하고 있어서,
네가 와도 할 게 없어.


마음 놓고 건강히 출산하고 오라던 말과는 딴판이었다. 내가 할 일이 없어졌으니, 조용히 조직을 떠나줬으면 좋겠다는 얘기였다.

나는 솔직히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한시도 한눈팔지 않고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 6년 정도 함께 일했던 상사였다. 나는 우리 부서뿐 아니라 회사에서도 좋은 평가와 평판을 받았었을 뿐 아니라 법적으로도 복직은 당연한 권리였다. 그런데 나의 키를 쥐고 있는 상사의 한마디 한마디는 이제는 적당히 나가라는 얘기였다.

 

나는 나 자신을 떠나 다음에 출산휴가를 떠날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무조건 복직을 해서 일을 잘 해내고, 절대 안 좋은 선례를 남기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을 드렸다.      


“다음 주 출근하기 전까지 제가 우리 부서에서 무엇을 하면 좋을지
사업계획을 구상을 해서 말씀드릴게요.
올 하반기 6개월 동안 그 사업계획이 성과가 없다면,
그 때 깔끔하게 사표 쓸게요.
제 일은 제가 스스로 만들어오겠습니다.”  
   

그렇게 내가 호언장담을 하자, 팀장님은 어쩔 수 없이 수긍하는 눈치였다. 사실 내가 순순히 사표를 쓸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억지로 밀어붙였다가는 법적으로도 문제가 될 것임을 모르는 바도 아닐 것이다.

점심을 먹자고 불렀던 팀장은, 자신은 다른 약속이 있으니 알아서 먹고 가라고 했다.

이미 점심시간은 한참 지나 있었다.      


법보다 먼저인 회사의 현실

팀장과의 상담을 마치고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데,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실연당한 여자처럼 벤치에 앉아 엉엉 울었다. 화가 나고 억울했다.      

‘아, 법이고 뭐고 다 소용 없구나. 출산율 어쩌니 저쩌네 해도 작정하고 퇴사시키려고 하면 못 버티겠구나.’    



  

그렇게 힘들게 복직을 했지만, 부서원들은 아무도 내가 그런 일을 당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다행히 복직하자마자 회사에서 필수로 이수해야 했던 교육과정을 당당히 1위로 통과해 인트라넷에 큼지막하게 실렸고, 대표이사의 상장도 주어졌다. 사람들은 출산휴가 다녀오더니 더 머리가 좋아졌다고들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채 6개월이 가기 전에 나는 계획했던 사업계획을 성공적으로 진행했고, 명실공이 현재까지도 중요한 사업영역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이었지만, 많이 부딪히고 많이 배울 수 있는 경험이었다.

어쩌면 이 얘기를 하면서도 고민이 많이 됐던 게 사실이다. 누군가는 보고 있을 나의 직장 동료들, 선후배들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름 심적으로 힘들게 복직을 한 터라, 게다가 아이는 친정엄마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며 키우는 터라, 둘째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계속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을 위해서는 둘째는 포기해야 하는 하는 게 현실이었다. 또 일과 육아를 동시에 완벽하게 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나라의 저출산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고, 다양한 법과 제도가 동원됐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인식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것에 눈치 덜 보고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있는 공무원과 공기업 등에 여성들이 더욱 몰리는 이유다.

사기업은 본능적으로 조직의  이익을 가장 우선시한다. 그래서 누가 더 조직의 이익을 책임져줄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어쨌든 여자 직원은 결혼과 출산으로 인해 중도에 회사를 그만두거나 출산휴가, 육아휴직을 갖는 경우가 많은 만큼 조직 논리로는 마이너스인 셈이다.

여자들도 결혼과 출산 등으로 인해 조직에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은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면서, 법조문만 따지고 있으면 누가 여성 직원을 선호하겠는가. 내 주변에도 임신한 사실을 숨긴 채 입사해 입사 6개월 만에 출산휴가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문제는 그런 일부 여직원을 핑계로 조직의 의사결정권자들이 성급하게 일반화시키는 것이다.      


‘이래서 여자는 뽑으면 안 돼. 출산휴가 가면 그 일은 누가 할 거야? 그래놓고 애 키운다고 제대로 일에 집중 안할 게 뻔해. 또 일할 만 하면 곧 그만두겠지.’      


여전히 이러한 마음의 소리가 조직 내에 뿌리 깊게 박혀있음을 느낀다. 글쎄, 지금은 많은 기업들이 바뀌었을까? 많이 바뀌었기를, 또 많이 바뀌고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여전히 저조한 출산율을 보면, 아직 갈 길이 멀게 느껴진다.      


어쨌든 무사히 출산휴가를 다녀와서 조직에 다시 적응해서 4년 이상 다녔지만 결코 행복하지는 않았다. 직급은 올라가는데 하는 일은 똑같았고,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조직은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문화가 뿌리깊었고,

아이의 어린이집 오리엔테이션조차 5살때까지 가본 적이 없었다. 특히 아이가 아프거나 육아로 인해 월차를 내는 것도 힘든 문화였기 때문이다. 아이가 입원을 했을 때도  

월차조차 내는 게 눈치보이는 회사...

연봉은 꽤 높은 회사였지만 자신의 삶이 없었다.  어느 순간 억대 연봉을 준다고 해도 미련이 남지 않을 것 같았다. 10년 동안 나를 완전히 소진시켜버린 그런 느낌이었다.


자꾸 스스로에게 “지금, 행복하니?”를 물었다.

늘 대답은 ‘아니’었다.


여자가 행복한 회사, 그냥 만들어보면 어떨까?

그렇게 10년 간 근무한 회사를 그만두면서 결심한 게 있었다. 보다는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회사였다.

주 4일, 하루 4시간만 일에 집중하는 워킹맘들이 즐겁게 일을 할 수 있는 꿈의 직장을 스스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러한 꿈을 꾸고 나와 직장 동료와 함께 창업을 하면서 우리의 꿈의 노트를 적어나갔다.


근무 중 첼로 레슨을 동료와 함께 받고, 점심시간은 2시간, 10시 출근 오후 4시 퇴근, 금요일은 휴무 등등 우리만의 기준을 하나씩  만들었다. 물론 마감에 쫓길 때는 한 달에 2~3일 야근을 해야 하고, 일하는 시간에는 몰입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회사를 나온 지도 이제 10년. 어쩌면 실현 불가능할 것 같은 꿈을 꾸고 나왔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이를 실현시켜왔다는 점에서 스스로에게 칭찬해주고 싶다. 특히 함께 일하고 있는 동료 워킹맘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꿈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업무분야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조직을 나와 생존할 수 없다고. 물론 그런 일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러한 미래를 꿈꾼다면, 기존 조직의 틀에 자신을 구겨넣기보다 새로운 틀을 만드는 도전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소소하지만 내가 10년 간 만들어오면서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기 때문이다.

더 많은 워킹맘, 아니 직장인들이 자신만의 기준으로 만든 워라밸 속에서 좀 더 행복한 삶을 만들어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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