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해지지 않는 법
깨달았다가도 자꾸만 익숙해지는 이유
아빠가 황달이 심해 이번달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엄마의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헐레벌떡 차를 몰고 갔다.
이 몇 달간 병원에 있는 아빠가 익숙해져 버렸다는 걸 알았다.
아빠 지인 몇분을 불러다 손잡고 고맙다 인사하고 몇가지 부탁하는 말도 하고. 보고싶은 사람들이 있냐는 물음에 민폐가 될까봐 선뜻 답하지못하는 아빠에게 말이라도 해보라고 했더니, 보고픈 사람들이 줄줄 나왔다.
상태가 악화돼서 병원에 계속 누워있는 상황에서도, 어떻게 해서든 나가서 아빠가 하던 일을 마저해야한다는 생각이 너무 강해서, 이런저런 정리할 것들을 입에만 올려도 말도 못붙이게 짜증을 냈는데, 오늘 먼저 나서서 정리할거리를 세세하게 일러주는 아빠를 보니 왠지 섭섭했다. 급격하게 안좋아진 몸상태를 이제는 아빠도 인지해서인지 꽤 담담하게 이거저거 읊어주는 아빠가 섭섭하고 눈물났다.
몇 달 전 입원하셨을 때만 해도 울고불고 아빠를 위해 기도하고 삶의 의미니 소중한 순간들이니, 아침마다 절 할 때마다 하루하루 성장하는 것처럼 깨달은 바가 많았는데, 어느샌가 그렇게 누워있는 아빠가 다시금 익숙해져 버렸다.
여름에 아빠가 입원하고 엄마가 병간호를 들어간 이후로, 나는 여름 내내 툭하면 눈물이 흐르고, 정신이 없고 멍한 상태였다. 아빠의 하루하루 상태에 따라서 엄마와 나의 마음이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하는 나날이었다.
그러다 이 장기화되는 상황에 내가 잠식당해서, 내 삶의 순간들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번뜩 들면서 서서히 정신 차리기 시작한 것 같다. 그때부터 이런저런 일들을 손에 잡긴 했는데, 정신이 붕 떠있는 기분이었고 주변에서도 뭐가 그리 바쁘고 정신없이 사냐는 말을 계속 들었다.
이때 손에 잡히는 일들은 많았지만 하나도 내 것이 된 게 없다. 그 시간들을 스쳐 지나가긴 했지만 관통한 것 같진 않다. 어떤 일을 손에 잡아도 집중 못하겠고, 계속 이거 손대다 저거 손대다 하루 다 가고 그렇게 몇 달이 흘러버렸다.
그렇게 정신없이 딱히 일군 것도 없이 시간이 흘러갔고, 내 딴엔 열심히 해보려고 벌인 일에서 실수하거나 신뢰를 잃는 일도 몇 번 있었다.
한숨 쉬는 날만 늘어가고, 재정상태로나 지금 하는 일에서나 가족등의 사적인 상황들 등에서 웃을 일이 없다 보니, 만나는 사람마다 나도 모르게 징징대게 되고, 푸념하게 되고, 핑계 대고 탓하고 있더라. 내가 지금 이렇게 정신없는 것도 아빠가 아파서인 것 같고, 그게 현시점에서 가장 쉽고 이해받을 수 있는 핑계였던 것 같다.
내 안에 풀리지 않은 채 쌓인 과제들과, 해야만 하지만 늘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미루고 뒷전이 된 많은 상황들 속에서 극심한 답답함을 느끼고, 그 마음을 지우고 싶어서 아침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한 3년 전부터 꾸준히 쓰다 말 다했는데 다시 그걸 꺼내 들었다.
이 아침일기가 요즘의 나에게 엄청난 통찰을 줬는데, 이건 다음에 따로 정리해 봐야겠다.
그리고 나는 앞서했던 백일 간의 백팔배를 흐지부지 긴 하지만 마쳤고, 천일 간의 백팔배를 시작한 지 십육 일째다.
아침에 못한 절을 결국 하루가 지나고 다음 새벽에 마치고 나니, 문득 여기서 글을 쓰며 스스로 위안을 받았던 기억이 떠올라, 다시 글을 써보려 한다.
나는 글을 그다지 잘 쓰지도 못하고, 잘 써야 한다는 강박에 결국 쓴다는 것조차 잊고 살지만, 하루의 느낀 것들을 정리하는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더라. 아침에 쓰는 글과는 또 다르게.
그래서 쌓이지 않는 가벼운 삶을 위해서, 그리고 훗날 또 마음이 힘들어 주저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할 나에게 위로할 거리가 필요할 것 같다. 당장 오늘의 나에게 필요해서 이 새벽에 끄적여봤다.
아빠가 급격히 안 좋아진 후로, 나에게 주어졌던 3년이란 시간을 헛되게 보낸 것에 절절하게 후회했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후로 지난 3개월간 난 똑같은 실수를 다시 반복하고 또 후회하고 있다. 익숙해져 버려서 잊어버린 거다. 다시 탓하고, 짜증 내고, 무기력하고, 회피하고 있었다.
익숙해지지 않도록, 익숙해지더라도 그 안의 소중함은 잊지 않도록 나의 순간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내야지.
언제 돌아봐도 후회 없는 진한 삶이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