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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 숙종 Jan 09. 2019

9. 돌 깨는 소리

     

 아내가 수술실에서 나왔다.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은 환자처럼 기진맥진한 모습이다. 의사는 하루 4리터 물을 마시고 상태를 지켜 본 후, 내일 퇴원해도 된다고 말했다. 의료보험이 안 돼 걱정하는 내게, 의사는 진료비가 500JD(75만원) 정도 될 것이라고 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친절했고, 6인실 병실은 텅 비었다. 새벽부터 이어진 끔찍한 일들이 모두 끝났다.     

 다음날 퇴원 수속을 하려다가 깜짝 놀랐다. 병원비가 너무 많이 나왔다. 80만 원을 예상했는데 무려 160만원이 넘었다. 2박3일 병원비가 터무니없이 비쌌다. 나중에 알았지만 아내가 수술한 ‘아랍 메디컬 센터’는 사우디에서 운영하는 사설 병원으로 요르단에서 가장 비싼 병원이었다. 작년 신체검사를 ‘아랍 메디컬 센터’에서 받은 기억이 있어 이 병원으로 왔다. 병원을 나오는 내내 비싼 병원비로 속이 쓰렸다.     

‘아내는 요르단에 여행 온 건지? 수술 받으러 온 건지?’     


 아내가 요르단에 온 날은 일주일 전이었다. 둘째 딸이 함께 왔다. 내가 요르단에 온지 1년이 넘었을 때였다. 요르단은 가족에게 신기함 보다 불편함이 많았다. 비가 자주오고 썰렁한 겨울 날씨, 달고 느끼한 음식, 택시타기 불편함 등……. 나는 일터에 출근하고 아내와 딸은 내가 월세로 있는 아파트에만 있었다. 

  바깥출입 없는 가족을 처음 초대한 친구는 ‘이싸’였다. 그는 문화부에서 나와함께 근무한다. 75세 된 아버지와 아내, 아들 넷을 둔 팔레스타인 출신이다. 그가 가족이 오기 전부터 우리를 초대하겠다고 했었다. 오늘 휴일을 맞아 차를 가지고 내 집으로 왔다.  


 가난하게 살고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그는 꽤 괜찮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가구와 실내 장식 등이 한 달 40만원으로 사는 가정 같지 않았다. ‘이싸’는 거실로 우리를 안내 한 후, 가족들을 소개하고 미리 준비한 식사를 가져왔다. 막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아내한테 문제가 생겼다. 배가 아프다며 거실에 가서 눕고 말았다.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 느낌이 나빴다. ‘이싸’ 부인이 끓여온 차를 마시고 아내는 괜찮다며 다시 식탁으로 내려 왔다. 다행이었지만 원인 없이 아팠고 약간의 구토 증세까지 있어 불안했다. 두 시간 쯤 얘기를 나눈 후 우리는 일어섰다. ‘이싸’ 아버지는 차문을 열고 “한국에 돌아가더라도 요르단에 올 일이 있으면 꼭 와 달라.”고 내 손을 잡았다.    


 상처 입은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막 잠들려는 데 아내가 또 배가 아프다고 한다. 외국에서 가장 난처한 일이 몸이 아플 때다. 휴일 밤 12시에 병원을 갈 수 없다. 아침까지 견뎌보자고 달랜 후 잠들었다. 잠결에 “끙 끙~” 소리가 들려 아침인가 시계를 보니 새벽 3시였다. 타이레놀과 차를 먹였으나 점점 더 통증이 심하다고 배를 움켜잡고 뒹굴었다. 아침까지 기다릴 수 없어 우린 부랴부랴 외출옷으로 갈아입었다.


 집에 남은 돈과 여권을 가지고 나왔다. 새벽에 어느 병원에 어떻게 가야 할지 막막했다. 아내는 현관 앞에 누워버렸다. 신음 소리에 이웃이 깰까 두려웠다. 아내를 딸 한 테 맡겨두고 택시를 잡으려고 길가에 섰다. “아우~아우~” “아우~아우~”하는 아내의 비명이 골목까지 들렸다. 이런 새벽엔 택시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질 않는다. 응급을 다투는 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큰 길로 뛰었다. 택시를 잡아서 집 앞으로 데리고 올 생각으로 어두운 길 위에 서 있었다.    

  

 지나는 택시가 없다. 숨이 넘어갈 듯 아파하는 아내를 생각하면 자가용이라도 잡아야 했다. 아무도 이른 새벽에 손을 들고 서있는 외국 남자 앞에 차를 세워 주지 않았다. 가끔은 빈 택시가 있었지만 무슨 이유인지 지나쳤다. 아내가 위급한 상태라 길가에서 마냥 택시를 기다릴 수 없었다. 도로 안쪽으로 들어가 양팔을 벌렸다. 택시 한대가 급정거했고, 운전수가 소리쳤다.

 “아휴! 당신 미쳤어요?”

 “아내가 아픕니다. 급해요!”

 어디로 갈 거냐는 물음에 집에 있는 아픈 아내를 태우고 ‘아랍 메디컬 센터’로 가자고 말했다. 그는 구세주였다. 앰뷸런스처럼 달려 10분 만에 병원 응급실에 도착 했다. 택시 운전수는 응급실 앞에서 클랙슨을 급하게 빵빵 울려 직원을 불러줬다. 고마운 택시 운전수에게 택시비를 두 배 주고 인사도 못한 채, 주저앉는 아내를 끌어 응급실 침대에 눕혔다. 아내의 비명은 계속 됐지만 난 병원이라 홀가분했다.    

  

 담당 의사가 초음파를 찍어봐야 원인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통증이 워낙 심해서 우선 진통제를 맞고 30분을 기다려 초음파 검사를 했다. ‘요로결석’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요로계에 돌이 생겨 소변 흐름을 막아 격심한 통증을 일으키는 질환이다. 

레이저로 돌을 부수는 수술을 받아야 된다고 의사는 말한다. 수술 경과가 좋으면 이틀 후 퇴원할 수 있다고 한다. 요로결석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아프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다음날 오후, 전문의가 와서 수술을 시작 했다. 나와 딸은 수술실 밖에서 초조히 기다렸다. 이국땅에서 처음 받는 수술이라 두려웠다. 레이저로 돌을 깨는 소리가 복도까지 들려왔다.


 “타닥타닥! 타닥타닥!……”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아내가 수술 받는 병은 평생 한번 있을까 말까하는 병이다. 

 ‘왜 하필 요르단까지 와서……?’ 

 ‘혹시 아내가 내게 시위하려 온건 아닐까?’

 돌 깨는 소리는 마치 죽비로 나를 타닥타닥! 때리는 듯 했다.

   

 가족이 한창 힘들 때, 나는 해외봉사를 한답시고 요르단으로 와버렸다. 딸이 의학 대학을 다니고 있었기에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울 때였다. 무슨 돈으로 학교를 다니고 있는지 나는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퇴직했기에 경제력도 없거니와 지친 서울 생활을 떠나 새로운 일을 하고 싶었다. 아내는 내가 남겨놓은 연금이 부족해서 펫시터(강아지 돌봄) 일을 하며 딸의 등록금을 내곤 했다. 초저녁잠이 많은 아내는 학교에서 새벽까지 공부하는 딸을 매일 태우고 다녔다. 그 즈음 난 가족을 잊고 봉사활동에만 매달렸다.    


 병원 지하 복도엔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다. 어젯밤 병실에서 잠을 설쳐 몸이 무거운데도 정신은 점점 말짱해 온다. 수술실에서 돌 깨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그 소리는 어두운 복도를 울리다가 내 마음을 치고 지나갔다.   

  

 내가 몰랐던 아픈 ‘아내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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