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아니라 숲을 봐야 한다

9. 형광팬 캠프

by 박구사

나는 구형 나침반 같은 사람이다. 작은 흔들림에도 한참을 헤매지만, 결국에는 옳은 곳을 가리키는 사람.


나무가 아니라 숲을 봐야 한다.


정형돈 팀과의 토론에서 마이크를 잡고 일어섰지만 카메라가 보이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평소 생각하고 있던 말도 아니었는데, 그냥 저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방송을 보면 긴장한 티가 안 나지만 나는 안다. 내가 저 때에 얼마나 긴장했는지. 운이 좋게 뒷말이 술술 풀리면서 토론에서 이겼고 한동안 저 말을 잊고 살았다. 중간에 책이나 강의에서 몇 번 들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워낙 뻔한 표현이라 별 감흥 없이 흘려 넘겼다.


형광팬 캠프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수험생활을 시작하면서 매일 책상 앞에 앉아 책과 씨름했다. 처음엔 대부분 내가 메쳐지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이놈의 책은 빈틈을 보여주지 않아서 매번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책에 진 기분이었다. 그로부터 2년쯤 지나고 나서는 매일 내가 책을 메쳤다. 그동안 책을 속속들이 파악해서 책과 씨름할 때마다 매번 이겼다. 상상 속 씨름판에서 책이 어려운 문제로 밭다리를 걸어도 난 흔들림 없이 정답을 디밀었다. 눈만 감으면 책의 어느 페이지에 무슨 내용이 있고, 그 옆 페이지에는 뭐가 있는지까지 자동으로 떠오를 정도였다. 책을 완벽하게 다 숙달했다고 확신하고 시험장에 들어섰다. 그러나 웬걸. 시험문제를 푸는데 얼음 조각이 등줄기를 훑었다. 분명히 책을 다 외웠는데 내가 모르는 문제가 있었다. 사과나무를 가장 잘 수정시키는 벌에 관한 내용은 없었는데?


시험장을 나오면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멘탈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한번 들기 시작한 불안감은 깨진 아이폰 액정의 금처럼 조금씩 커졌다. 그렇지만 그동안 공부한 날들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불안감을 애써 외면했다. 발표 당일.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고 금이 잔뜩 가 있던 내 멘탈은 와르르 무너졌다. 불합격이었다.


간신히 자리에 다시 앉기까지 한 달쯤 걸렸다. 자리에 다시 앉기도 힘들었지만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내 공부 방법이 잘못되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방법 안에서는 최선을 다했다. 정말이었다. 그것은 내가 가장 잘 알았다. 그렇지만 모르는 문제가 있었고 시험에 떨어졌다.


2년의 시간 동안 학원도 동영상 강의도 듣지 않고, 물어볼 학교나 선배도 없이 홀로 공부했다. 때때로 시행착오를 겪을 때면 노력으로 메꾸면 된다고 여기며 더욱 책에 덤벼들었다. 책이 무섭게 느껴지는 날에도 줘 터질지언정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불안할수록 더 파고들었고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내가 떨어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다 걸어가는 편한 길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선택한 길로 가도 반드시 합격에 닿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괴롭고 힘든 날들을 견딜 수 있었던 건 내 방법에 대한 믿음과 내가 쌓아 올린 하루들이 얼마나 단단한지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몸과 마음이 깎여나가는 수험생활 동안 나는 내가 날카로워진다고 생각했다. 깎여 나가는 만큼 예리해져서 누구보다 깊이 찔러 들어가 합격에 닿을 수 있을 거라고.


그러나 불합격은 나를 꺾어버렸다. 나는 날카로운 만큼 쉽게 부러졌다. 내가 믿어왔던 것을 믿지 못하게 됐고 그동안 쌓아 올린 하루들이 어딘가 물렁물렁해 보였다. 쌓는 방법도 완전히 잘못된 것 같았다. 자리에는 앉았지만, 한동안은 책을 펴지 못했다. 대신 공부 방법에 관한 책을 읽거나 공부 방법을 끊임없이 검색했다. 내 공부 방법을 못 믿게 되었으니까.


그러다 공부를 잘하게 해주는 약에 대한 게시글을 읽었다. ADHD이라는 용어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아동의 집중력 결핍 장애를 치료하기 위해 처방하는 약이 있는데 이걸 먹으면 집중력이 몇십 시간이고 간다고 했다. 성인도 병원에서 진단만 받으면 먹을 수 있으며 공부, 특히 시험을 준비하는데 특효라고 했다. 더 검색한 결과 서울 손꼽히는 대학의 게시판이나 의전원, 로스쿨 준비생들 카페에서도 꽤 언급되고 있었다. 미국 유학생들이나 대치동 강남의 학원가에는 이미 공부 잘하는 약으로 널리 알려져 관련 기사도 많았다.


명백한 불법이었고 위험한 일이었지만 합격과 성적에 눈이 먼 사람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퍼져있었다. 이거였다. 내 불합격의 원인. 검색 결과를 읽는 내내 심장박동이 빨라지더니 나중에는 몸에서 김이 나는 것 같았다. 얼굴 없는 내 경쟁자들에게 화가 났다. 이번 시험의 합격자들이 했던 것과 내가 하지 않은 것. 각성제. 바로 이거였다.


나는 비난의 화살을 내 공부 방법에서 각성제를 먹는 경쟁자들에게 돌리면서 무너진 자존감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경쟁자들이 실제로 먹었건 말건 상관없었다. 내 멘탈은 바닥을 치다 못해 뚫고 들어가 지옥의 문 앞까지 떨어져 있었다. 누구라도 원망하고 남 탓을 하지 않으면 숨도 못 쉴 정도로 여유가 없었다. 나는 내 불합격을 합리화 하기 시작했다.


‘그래, 내 공부 방법이 틀리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어금니가 깨질 정도로 공부했는데 내가 잘못했다니? 상대방이 반칙을 썼으니 내가 진 것일 뿐이야.’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점점 편해졌다. 곧장 약 처방에 대해서 검색하자 수많은 정보가 나왔다. 강남의 어느 병원이 처방을 쉽게 해 준다더라, 한 달에 얼마가 든다더라, 부작용은 있지만 일단 합격하면 만사 오케이다. 불합격이 발기부전보다 무섭다 등등. 코카콜라가 비싸서 오란씨를 마시는 형편이지만 합격을 위해서는 밥값을 줄여서라도 처방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불법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내 경쟁자들이 먹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도 먹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약을 먹겠다고 생각하자 이제 합격이 정말 코 앞인 것 같았다. 경쟁자들이 쓴 반칙을 알아냈으니 나도 반칙을 쓸 것이다. 이건 100m 달리기에서 30m 나 앞서서 출발한 거나 다름없었다. 반칙을 쓰지 않아도 결과는 간발의 차였으니 나도 반칙을 쓰기만 하면, 각성제를 먹기만 하면 다음에는 기필코 이길 것이다.


‘후우우....’


심호흡해도 도저히 진정이 안 돼서 도서관 밖으로 나갔다. 신선한 공기가 필요했다. 벤치에 앉아서 머리를 식히며 당장 내일 처방을 받고 공부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선을 여기저기로 돌리다 페인트가 벗겨진 창살 너머로 ‘짱아’가 보였다. 짱아는 도서관 맞은편 냉동식품 창고 앞에 묶여있었다. 항상 가게 앞에 엎드려있는 통통한 웰시코기. 얼마나 똑똑한지 주인이 타는 흰색 트럭이 올 때만 일어나서 꼬리를 흔들었다. 정말 똑같이 생긴 흰색 트럭이 지나가도 주인의 트럭이 아니면 관심도 주지 않았다. 이따금 짱아는 배달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기도 했다. 그럴 때면 뒷자리에 두 발로 서서 주인의 어깨 위에 앞발을 착 올리고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도서관의 많은 사람이 짱아를 보며 위안을 얻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저 녀석을 보면서 시험에 합격하면 널찍한 마당 딸린 단독주택에서 레트리버를 서너 마리 키우며 살기로 다짐했다. 퇴근해도 아직 해가 하늘에 걸려있는 삶. 사랑하는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고 따뜻한 동물을 쓰다듬으며 해가 떨어지는 걸 바라보는 저녁. 더는 밥줄이 끊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밤.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 이 시험에 도전했다. 한창 진상 고객들에게 시달릴 때는 출근길이 회초리를 맞으러 가는 것 같았다. 그걸 견디며 출근했는데도 어느 날 회사가 사라졌다. 이건 사는 게 아니었다. 더는 이렇게 살 수 없어서,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면 좀 더 행복해질 것 같아서 2년째 이 고생을 한 것이다.


나는 합격이 아니라 행복해지고 싶었다.


그 순간, 꾸벅꾸벅 졸던 `짱아`가 귀를 쫑긋하더니 발딱 일어섰다. 멀리서 흰 트럭이 들어오고 있었다. 내 엄지보다 짧은 꼬리와 하얀 엉덩이를 흔들며 아직 보이지도 않는 주인을 반겼다. 그걸 보고 있자니 약을 먹는 게 우습게 느껴졌다. 합격하기 위해 몸을 망치는 약이라니?


나무가 아니라 숲을 봐야 한다.

나는 합격을 하고 싶은가? 행복하게 살고 싶은가?


약의 부작용에 대해서 다시 찾아봤다. 공격성, 우울증, 심혈관질환, 정신착란, 발기부전 등등 합격에 눈이 멀었을 때는 제대로 읽히지 않았던 부작용들이 그제야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합격을 위해서 이것들을 모두 안고 간다니 그렇게 합격해서 행복해질 수 있을까? 한번 쉬운 길에 손을 댄 사람이, 합격하고 나면 손을 끊을 수 있을까? 나는 코앞에 닥쳐온 불안과 위기에 손쉬운 방법을 택하려고 한다. 남을 비난하고 약물에 의존하기. 그럼 다음 위기에는? 남을 공격하고 약물에 더 의존해야 할까.


자리로 돌아가 가장 기초가 되는 책 원예학 개론을 폈다. 책을 만지는 것도 괴로웠지만 그렇게 해야 했다. 그리고 맨 첫 장부터 다시 폈다. 그리고 내가 모두 외운 부분과 시험에 나왔는데 내가 놓친 부분, 그리고 시험에 나오지 않았지만 내가 지나친 부분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신기했다. 마치 2학기가 시작하고 나서야 처음 본 반 친구처럼 분명 내 눈앞에 있었는데 인식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있었다. 그것은 표나 그림 같은 네모 박스 안에 있는 것들이었다. 대부분 본문에 내용이 충분히 설명되어 있었고 표나 그림 자체는 지엽적이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간 게 화근이었다. 이 극악한 난이도의 시험에서는 표에서 숫자만 하나 바꿔서 또는 그림에서 그래프 눈금만 바꿔서 문제가 출제되었다. 그 말은 곧 10권 가까이 되는 책에 내가 놓친 그림과 표를 다 외워야 합격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며칠간은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산더미 같은 글자들을 밀고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과수 원예학 마지막 부분에서 나를 멘붕에 빠트렸던 한 줄이 발견되었다. 작은 벌 사진 밑에 ‘사과 수분에 탁월한 머리뿔 가위벌’이라는 설명이 나와 있었다.


이거였다. 내 경쟁자가 각성제를 먹어서가 아니라 내가 부족했던 부분이 합격을 가른 것이다. 그 후로 책 10권의 모든 표와 그림을 외우면서 내 방심과 부족함의 증거들을 내내 마주 봤다. 정말로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혹시나 내가 한두 문제 나올까 말까 한 표와 그림을 외우느라 정작 중요한 본문의 내용을 잊어버리게 될까 봐 조바심이 났다. 그럴 때면 머리 한구석에서 슬그머니 하얀 알약들이 떠올랐다. 그럴 때마다 내가 왜 이 시험에 매달리는지 떠올렸다.


나무가 아니라 숲을, 숲을 보려고 했다. 내가 마당에 앉아서 레트리버를 쓰다듬으며 노을을 바라보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도 머릿속에서 알약들이 사라지지 않을 때에는 나 대신 얼굴 없는 경쟁자들에게 먹였다. 경쟁자들이 슈퍼맨이 되는 알약을 먹고 공부한다고 생각하니 승부욕이 타올랐다. 절대로 지고 싶지 않았다. UFC 244에서 호르헤 마스비달은 경쟁자 네이트 디아즈와의 경기를 앞두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어떤 상대는 나를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일어나게 한다. 네이트는 그런 놈이다.`


각성제도 그랬다. 그것은 의자에서 일어나려는 나를 바싹 당겨 앉게 했다. 나는 약 기운을 빌어 16시간씩 공부할 수는 없지만 10시간을 밀도 있게 채워나갔다. 핸드크림을 바르면서도 눈은 암기 노트를 봤고, 화장실에 걸어가면서도, 소변을 보면서도 눈은 암기 노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낮잠 시간도 가장 효율적으로 자기 위해 책을 찾아봤다. 수험생활 동안 자주 아픈 목과 허리를 단련하기 위해 손바닥이 까지도록 바벨을 들었고 운동을 마치고 샤워하러 가는 짧은 순간에도 암기 노트를 봤다.


얼마 전 일요일 점심. 각성제에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봤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각성제를 사용하는 학생들, 예술가, 금융인, 운동선수를 보여주면서 그것의 부작용과 의존성을 경고했다. 마지막에는 재미있는 실험을 보여줬는데 각성제와 위약을 복용한 사람 간의 효율성에는 의미 있는 차이가 없었다. 각성제는 없던 능력을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원래 본인이 가지고 있는 것을 활용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특히 알약만 먹으면 뭐든 잘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중독자의 인터뷰가 흥미로웠다.


나는 형광팬 캠프에 다녀오고 나서 본시험에 불합격하며 바닥을 쳤지만 다음 해 2관왕이 되었다. 농촌지도사(7급)와 농업연구사(6급) 시험에 연달아 합격했다. 요즘은 왕복 108km를 출퇴근하며 매일 책을 읽고 작가가 되기 위해 점심시간마다 쌀을 씹는 대신 글을 쓴다. 덕분에 입사하고 4년 동안 글쓰기로 11개의 크고 작은 상을 받았다. 이 책도 그동안 받은 상금을 모아서 만들었다. 올해는 함께라면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사람과 결혼했다.


마침내 행복해졌다. 나는 내가 어떻게 역경을 이겨내는 사람인지 안다. 나는 구형 나침반 같은 사람이다. 작은 흔들림에도 한참을 헤매지만, 결국에는 옳은 곳을 가리키는 사람. 힘들어도 옳은 것, 돌아가도 바른 것을 고르는 사람이기에 끝내 행복해질 수 있었다. 행복한 일만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불행하고 힘든 일도 잘 이겨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다. 그래서 나도 뭐든 잘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부정적인 생각이 차올라 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고, 민원인에게 욕을 먹거나, 정성 들여 키운 식물이 두더지의 습격으로 죽어버리면 주저앉고 싶다. 지금 내 앞을 가로막은 나무가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처럼 거대해 보일 때. 나는 한 발짝, 두 발짝씩 계속 물러난다. 여태껏 왔던 걸음을 아까워하지 말고, 나를 추월하는 사람들도 시샘하지 말고 계속 물러난다.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을 것 같던 나무가 손바닥보다 작아질 때까지. 그러고 나면 넓은 숲 속 나무 사이에 난 수많은 오솔길이 보일 것이다.


좀 돌아가면 어떻고 누가 추월하면 어떻다는 말인가. 우리를 가로막은 나무 덕분에 우린 인생이라는 숲을 좀 더

잘 살피게 될 것이다. 남들을 제치고 반칙을 써가며 가장 먼저 숲의 맨 끝에 도착했다고 생각해보자. 가장 먼저 도착해도 당신을 반겨줄 사람은 없다. 뒤늦게 하나둘 도착한 사람들이 숲에서 겪은 일들에 관해 이야기 나눌 때 당신은 한마디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남들보다 빨리 달리느라, 약이 몇 알 남았는지 세느라 숲을 살펴볼 겨를도 없었을 테니까.


어쩌면 내가 했던 말은 카메라가 아니라 수험생활을 앞두고 가본 적 없는 숲 속으로 떠나는 스스로에게 했던 말인지도 모른다.


나무가 아니라 숲을 봐야 한다고.



이전 13화내 불합격의 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