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불합격의 원인

8. 형광팬 캠프

by 박구사


불합격하고 나서 주변 탓을 할 때는 동생과 같이 살면서 설거지, 청소 같은 집안일에 쓴 시간도

원망스러웠다. ‘동생이 나 대신 다 했으면 내가 붙었을 텐데...’



내가 응시한 지역의 합격선은 10년간 90점을 넘은 적이 없었다. 시험을 보고 나서 가채점해 본 결과 내 점수는 91점이었고, 당연히 합격할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 불안해 보였던 건 괜한 걱정 때문일 거야.’ 하고 위안했다. 문제 중에 생전 처음 보는 내용도 있었지만 그래도 좋은 점수를 받았으니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합격자 발표 당일. 본가에서 부모님과 영화도 한 편 보고, 외식도 하고, 양주까지 준비해 놓았다. 발표는 오후 7시쯤이라고 했는데 기다리지 못하고 축하주를 한 잔씩 나눠 마셨다. 모니터 앞에 모여 앉아 합격자 공고가 뜨자마자 확인을 했다. 내 번호가 없었다. 이상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한글 파일을 삭제하고 다시 내려받아서 확인해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옆에 앉은 부모님도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아시곤 표정이 굳었다. 시끌시끌하던 집안은 한순간에 차갑게 식었다. 마우스를 잡은 손끝이 아파서 주무르다 깜짝 놀랐다. 허옇게 변한 손은 내가 태어나서 만진 손 중에 가장 차가웠다. 눈을 깎아서 만든 사람의 손 같았다. 도저히 부모님과 같이 있을 자신이 없어서 집을 나왔다. 깜깜한 아파트 단지를 멍하니 걸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시험에 떨어지니까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정말 내 평생의 운을 ‘형광팬’ 캠프에 합격하느라 다 쓴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하필 내가 시험을 본 해에 합격선이 100점이 넘는다니. 이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무한도전> 멤버들을 만난 형광팬 캠프는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경험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원망스러웠다. 수험 생활을 앞두고 캠프에 간다고 허비한 시간이 새삼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합격자 발표도 나기 전에 부모님께 큰소리를 떵떵 친 주제에 보기 좋게 떨어지다니. 내가 얼마나 미운지 내 몸 어디 한 군데쯤 부러트리고 싶을 정도였다. 한동안 캠프에 가지 않고 공부를 더 했다면, 합격했을 거란 생각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자려고 누우면 천장이 나를 내리눌러 몸이 비틀리는 상상을 했다.


내가 잠을 잘 자든 말든 시간은 계속 흐르고, 해야 할 일은 해야 하는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몸을 좀 추스르고 자신을 미워하는 것도 잦아질 때 즈음.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기존에 하던 방법으로는 안 될 것 같았다. 앞으로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생각해봤다. 그때 떠오른 것이 또 형광팬 캠프였다. 내가 시험에 떨어진 원인.


캠프 당일 집을 나서면서 이 경험이 내 인생을 바꾸리라는 예감했었다. <무한도전> 멤버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무언가 내가 알지 못했던 엄청난 성공의 비결, 인생의 비밀 같은 것들을 알게 되리라고 은연중에 기대했었다.


막상 캠프에 가 보니 워낙 바빠서 제대로 이야길 나눌 시간도 거의 없었다. 촬영 현장은 정신없이 돌아갔고, 다들 자기 몫을 하느라 열심이었다. 긴 촬영 끝에 장기자랑에서 유재석 팀이 1등을 했다. 상으로 야외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게 되었는데, 촬영이 늦어지면서 새벽 2시가 넘어 버렸다. 심지어 조명 문제로 밥을 먹기 위해서는 더 기다려야 했다. 우리들은 배고프고 지쳐서 로비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데 재석형은 고장 난 조명 대신 장비를 가져오는 기사분께 조심해서 오시라고 전화를 하고, 지친 작가들을 먼저 소파에서 쉬게 했다. 팀원들의 어깨를 한 명씩 주물러주다가 새벽 순찰을 하는 경비원 할아버지에게 먼저 다가가서 인사를 드렸다. 거기다 손주에게 보여주시라며 동영상도 찍어드렸다. 가만히 소파에 기대서 그 모습을 보는데 꿈을 꾸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조명이 준비되자 멤버와 스태프들은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에도 저녁 7 시인 것처럼 움직였다. 캠프파이어를 시작으로 재석형의 깜짝 생일파티, 야외에 차려진 바비큐를 맛깔나게 먹는 모습까지 촬영했을 때는 이미 새벽 5시가 다 되었다. 재석형은 마지막 사람인 내가 잠자리에 눕는 모습까지 카메라로 찍어주었다. 잘 자라는 인사에 대꾸하고 눈을 감자마자 아침이었다. 눈을 감았다가 뜬 것 같은데 벌써 7시였다. 억지로 눈을 뜨자 옷을 갈아입은 재석형이 여전히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나는 내가 꿈을 꾸고 있는 줄 알았다. 아니 철인이 아니고서야 사람이 저럴 수 있단 말인가? 2시간밖에 못 자서 몸이 무거웠지만, 저렇게 열심히 하는 재석형을 보니 피곤한 기색을 보일 수가 없었다. 오히려 저 배려에 보답하고 싶어서 기운을 끌어냈다.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배려가 나의 120%를 이끌어냈다.


이런 배려가 촬영 현장의 분위기를 좋게 만들고, 서로의 에너지를 북돋아서 매주 사랑받는 방송을 만드는 힘이 되는구나 싶었다. 재석형뿐만 아니라 멤버들과 스태프들 모두 카메라가 돌아갈 때보다,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을 때 더 멋있는 사람들이었다. 출연자와 스태프가 서로 배려하며 에너지를 주고받는 사이, 좋은 기운은 점점 더 커졌고, 그 결과 준비했던 것들이 촬영에 들어가면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재석형과 형광팬 팀원들이 따로 만난 식사 자리에서도 재석형은 4시간 내내 이야기했다. ‘어떻게 하면 방송이 더 재미있을까’에 대하여.


나는 죽었다 깨도 저렇게 못 할 거라 생각했다. 저런 노력과 최선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전과 똑같은 방법으로 공부했고 불합격했다.


형광팬 캠프는 그냥 잘 놀다 온 신기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 경험은 내 안의 노력과 최선에 대한 기준을 바꿨다. 내 수험 생활에는 군더더기가 많았다. 포기하지 못하는 것들도 많았고, 챙겨야 할 것과 걱정해야 할 것들도 많았다. 불합격하고 나서 주변 탓을 할 때는 동생과 같이 살면서 설거지, 청소 같은 집안일에 쓴 시간도 원망스러웠다.


‘동생이 나 대신 다 했으면 내가 붙었을 텐데...’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만약 그랬어도 난 합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점수는 더 형편없었을 것이다. 배려는 시간 낭비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 일이니까. 더군다나 진짜 노력하지도 않고서 애꿎은 남을 탓하는 사람이 무슨 합격을 바랄 자격이 있을까.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재석형도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는 방송을 만들까를 매일 고민하는데, 나는 그 절반이라도 노력을 했던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고서야 형광팬 캠프가 정말 내 인생을 바꾸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유명한 연예인들이랑 놀러 갔다 와서가 아니라, 순도 높은 노력이 무엇인지를 옆에서 봤기 때문에. 배려는 상대방뿐만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다시 공부를 시작하면서 스마트폰을 없애고, SNS 계정을 삭제하고, 공부에 집중하는 데 불필요한 것들을 치워버렸다. 하루 종일 어떻게 하면 합격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소변보는 방법도 바꿨고, 잘 때도 합격에 도움이 되도록 자는 방법이 없을지 고민했다. 동생을 대신해서 장을 보고 청소하고 설거지할 때면 나는 나를 예뻐할 수 있었다. 사소한 일들이지만 수험 공부를 하면서도 가족을 배려하는 자신을 기특하게 여겼다. 동생도 그런 오빠를 생각해서 수험 생활 내내 나를 챙겨주었다. 서로 맛있는 걸 나눠 먹고, 무거운 짐을 나눠 들고, 잘 마른빨래를 개면서 나는 의자에 더 오래 앉아있을 힘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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