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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구사 Dec 14. 2020

숫자로 확인되지 않는 것을 믿어야 할때 2

1. 아직도 무한도전을 봅니다

* * *


내가 무거운 가방을 앞으로 메고 걷고 있다. 디스크가 심해졌기

때문에 가방을 뒤로 멜 수 없기 때문이다. 영등포 구립도서관에

서 당산동 낡은 오피스텔로 이어지는 정비소 골목. 하늘에는 눈

이 내리고 있고 길에서는 기름 냄새가 난다. 나는 걸으며 손에 쥔

암기노트를 읽다가 노트를 덮는다. 깊은 한숨. 잔뜩 날리는 눈송

이들은 바닥에 닿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더럭 겁이 나서

걸음을 멈춘다. 하늘에는 눈송이가 가득한데 깜깜한 골목에는 눈

송이도, 눈이 쌓이는 소리도 없다. 내 노력은 쌓이고 있는 건가?

아니면 저 눈송이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는 걸까. 나는 그

대로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


‘감자 영그는 소리를 들어본 적 있어?’


‘실력은 통장 잔고처럼 숫자로 확인할 수 없으니 불안하겠지.

그렇지만 영그는 소리가 나지 않아도, 감자는 자라나. 농부가 땅

속에 있는 감자를 확인할 길이 없어도 묵묵히 거름과 사랑을 주

기 때문이야.’


‘농부의 마음으로 공부하자.’


‘조바심 내지 않아도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 * *


박수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노래를 마친 남자가 관객들

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무대를 내려오는 남자는 윤성기였다.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며 당신이 부른 말하는 대

로를 들으며 힘든 날들을 버텼다고, 정말 감사하다고 했다. 그는

웬 남자가 울먹거리며 인사하자 당황해 보였지만 나는 뒤돌아 천

천히 국회를 빠져나왔다.


지하철을 타러 곧장 국회의사당 역으로 가지 않고, 당산동 쪽으

로 걸었다. 이 시험을 시작하기 전, 여의도 MBC 앞에 텐트를 치

기 위해 걸었던 길을 거꾸로 걸었다. 매일 드나들던 영등포 구립

도서관을 지나 회사원인 척 몰래 이용하던 구내식당 앞도 지나쳤

다. 기름 냄새가 여전한 정비소 골목을 걸어서 예전에 살던 당산

동 집 앞에 도착했다.


익숙한 옛집의 현관문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러자 내 안에서 어

떤 이야기 하나가 완결된 느낌이 들었다. 세상이 나에게 어떤 비

밀을 살짝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숫자로 확인되지 않는 것을 믿길 잘

했다고 여러 번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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