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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구사 Dec 14. 2020

순간은 손 안에서 2

2. 형광팬 캠프

‘인생이 다 그런 거 아니겠어?. 인생에는 원래 마법 같은 순간은

없는 거야. 그러니까 다들 팍팍하게 살지.’ 하고 애써 마음을 추슬

렀다. 이미 끝난 일을 더 붙잡고 있을 수 없었다. 서른이 넘어 늦

깎이 수험생이 된 이상 생활비부터 수험공부까지 신경 써야 할

일이 잔뜩 있었다. 내가 선물을 못 받건 속상하건 간에 수험서와

고지서는 쉴 새 없이 코앞에 디밀어졌다. 수험생활이 얼마나 길

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통장에 있는 돈을 조금이라도 아껴 써야

했다. 결국 콜센터로 돌아갔다. 단돈 몇십만 원이라도 아쉬웠으

니까. 오후에 콜센터 아르바이트를 하고 오전과 밤에 수험공부를

했다. 그렇게 완전한 수험생도 완전한 직장인도 아닌 상태로 어

중간한 날들을 보냈다. 몸은 고단하고 마음은 불안했다.


어쩌면 그 반대였을지도 모른다. 하루 종일 갈팡질팡하는 마음

은 고단했고 자리에 앉을 때마다 달라지는 장소에 몸은 불안했으

니까. 그렇게 지내다 보니 한동안은 되는 일도 없었다. 시험을 준

비한답시고 책을 샀는데 알고 보니 전혀 다른 과목이기도 했고,

준비하는 직렬인 농업 분야는 책을 봐도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

었다. 책에 ‘옥수수가 도복 하게 된다.’라고 쓰여 있어서 유도선수

가 입는 ‘도복’(道服)인 줄 알고 옥수수도 옷을 입는 줄 알았다. 가

로수가 겨울에 볏짚으로 된 목도리 같은 걸 두르는 것처럼. 알고

보니 식물이 쓰러지는 걸 ‘도복’(倒伏)이라고 했다. 비전공자라 이

런 기본 단어조차 모르니 매일 공부해도 진도는 앞으로 나갈 생

각을 안 했다. 늪에 빠진 채 쇳덩이를 달고 발버둥 치는 느낌이었

다.


그러던 중 <무한도전>에서 형광팬 캠프 지원자를 모집했다. 멤

버 별로 형들의 광팬을 찾는다는 콘셉트이었다. 반쪽만 성공한

추억 만들기가 생각났다. 딱 봐도 어마어마한 경쟁률일 텐데 과

연 내가 될까 싶었지만 일단 눈 딱 감고 지원했다. 가장 경쟁이 치

열해 보이는 유재석 팀으로. 사실 경쟁률 차원에서 인기가 좀 덜

한 멤버에게 지원하는 게 확률이 더 높지 않을까 했지만 그런 계

산을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 결국 나는 단순하게 생각하기

로 했다.


‘평생 단 한 명과 캠프를 간다면 누구와 갈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고민은 길지 않았다. 한 번뿐인 기회라면 후회

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사연을 작성하러 들어간 게시판에는 이

미 어마어마하게 많은 글들이 올라와 있었다. 똑같은 글을 중복

해서 올리는 사람은 물론이고 아픈 사연이 있는 사람, 결혼을 앞

둔 사람, 해외에 있는 사람 등등 게시판에 사연 올라오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새로고침을 할 때마다 화면이 바뀌어있었다. 부랴

부랴 게시글을 작성했다.


‘저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유재석의 광팬입니다. 지난번 선거

특집에서 전국 1등으로 투표하기 위해 방송국 앞에 텐트를 쳤

던 사람이 접니다. 미련 없이 선물도 받지 않고 쿨하게 떠난

저를 꼭 뽑아주세요.’


선물은 내 실수로 못 받았지만 합격을 위해 없는 쿨함을 쥐어

짜냈다. 첨부 파일에는 텐트 앞에 서 있는 내 사진과 김태호 피디

가 리트윗 한 사진이 실린 기사를 캡처해서 올렸다. 글을 저장하

고 내가 쓴 글을 다시 확인하려는데 이미 보이지 않을 정도로 뒤

로 쭉 밀려나 있었다. 경쟁률이 어마어마하구나 싶었다. 며칠 뒤

3일 정도 모집을 받았는데 10,000명이 훌쩍 넘는 인원이 지원했

다는 기사를 보고 마음을 접고 있었다. 인생에 마법 같은 순간은

쉽게 찾아오지 않으니까.


그러나 마법 같은 순간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 안에서 반짝거

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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