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형광팬 캠프
내가 선물을 못 받건 속상하건 간에
수험서와 고지서는 쉴 새 없이 코앞에 디밀어졌다.
손 안의 전화기가 반짝거렸다.
나는 요즘 오전엔 도서관에 갔다가 오후엔 콜센터에서 전화를
받고, 밤엔 다시 도서관에 간다. 어디든 벨 소리가 울리면 안 되는
곳이라 전화기는 무음으로 해놓는다. 주머니에 있었으면 전화가
온 줄도 모르고 있었을 테지만 버스 도착 시각을 확인하려는데
전화가 왔다. 02로 시작하는 일반 전화. 보험이나 인터넷에 가입
하라는 스팸 전화일 것이다. 통화 거절 버튼을 누르려다 그냥 받
았다.
다시는 돌아가기 싫었던 콜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뒤로
스팸 전화 같아도 일단 받게 되었다. 스팸 전화를 받으면 미리 정
해놓은 3단계를 거친다. 1단계. 정중하게 인사한다. 2단계. 단호
하게 거절한다. 3단계. 재빨리 끊는다. 일단 내가 전화를 받았으
니 상담원도 하루에 할당된 콜 수가 하나 채워졌을 것이다. 전화
를 걸어서 고객이 받은 횟수를 콜 수라고 부른다. 보통 고객에게
전화를 거는 아웃바운드 상담원들은 하루에 백 통 정도의 정해진
콜 수를 채워야 기본급을 받는다. 기본 콜 수를 못 채우면 집에도
안 보내는 실장들이 많기 때문에 꼭 채워야 한다.
단호하게 거절하고 빨리 끊는 건, 필요한 게 합격 소식밖에 없
는 가난한 수험생 말고, 돈이 있는 사람과 통화를 해야 뭐라도 팔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콜 밥을 먹다 보니 ‘남의 전화를 함부로
끊으면 결국 나에게 다 돌아온다.’는 생각이 들어서 정한 방침이
다.
어떻게 거절해야 서로 편할까 하는 생각을 하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인사를 하고 10초 정도 지났을 때 나는 신림역 사거리
에 주저앉아 있었다. 살면서 전화를 받고 다리가 풀리는 일은 흔
치 않다. 그렇지만 이런 전화를 받으면 누구라도 다리가 풀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박구사님 맞으신가요? 저희는 MBC 무한도전 제
작진입니다. 박구사님? 안 들리세요?”
무한도전 제작진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
저앉았다. ‘어? 이게 뭐지? 꿈인가.’ 넋이 나가서 앉아있는데 전화
기 너머에서 웃음소리와 함께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전화기를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단단히 쥔
전화기에 대고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정말 너무너무 감사하
고 저는 지금 꿈만 같고 무한도전 제작진 여러분 자손만대에 복
을 받으시고(실제로 말했다) 박 씨 가문의 영광이다. 등등. 끝없이
이어지는 내 말을 끊고 작가님이 물으셨다.
지난번에 <무한도전> 선거 특집에서 전국 1등으로 투표하신 분
맞으시냐고. 만 개가 넘는 사연 중에 워낙 특이해서 관심이 갔다
고. 그때 저희가 선물도 드리지 못하고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었
는데 사연을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고 했다. 어떤 분인지 궁금했
다고. 여기까지 설명을 듣자 무슨 일인지 대충 감이 잡히기 시작
했다.
방송국 앞에 텐트를 치고 전국 1등으로 투표해서 기사도 실리
고 제작진과 인터뷰도 했지만 본방송에는 통편집당했다. 투표장
에서도 <무한도전> 멤버들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추억 만들기
는 성공한 듯 실패한 듯 어정쩡한 상태로 끝났고 나는 본격적으
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선거가 끝나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머리를 식히러 도서관 벤
치에 앉아있다가 별생각 없이 트위터에 접속했다. 투표 전날 텐
트에서 인증샷을 올리려고 만들었던 일회용 계정이었다. 여기저
기 둘러보다 메시지 함을 눌렀는데 왠 걸? 메시지가 여러 통 와
있었다. <무한도전> 제작진이 선물을 보내려고 하니 제발 연락을
달라는 메시지였다. 부랴부랴 메시지에 적혀있는 연락처로 전화
했지만 너무 늦었다. 시간이 너무 지나서 준비한 선물은 이미 다
른 곳에 사용했다는 답변을 들었다. 맥이 탁 풀렸다. 뭐 하나 마음
대로 되는 일이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