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형광팬 캠프
작은 흔들림에도 한참을 헤매지만,
결국에는 옳은 곳을 가리키는 사람.
“나무가 아니라 숲을 봐야 한다.”
정형돈 팀과의 토론에서 마이크를 잡고 일어섰지만, 카메라가
보이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평소 생각하고 있던 말도 아니었는
데, 그냥 저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방송을 보면 긴장한 티가 안
나지만 나는 안다. 내가 저 때에 얼마나 긴장했는지. 운이 좋게
뒷말이 술술 풀리면서 토론에서 이겼고 한동안 저 말을 잊고 살
았다. 중간에 책이나 강의에서 몇 번 들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워
낙 뻔한 표현이라 별 감흥 없이 흘려 넘겼다.
형광팬 캠프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수험생활을 시작하면서 매
일 책상 앞에 앉아 책과 씨름했다. 처음엔 대부분 내가 메쳐지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이놈의 책은 빈틈을 보여주지 않아서 매번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책에 진 기분이었다. 그로부터 2년쯤 지나
고 나서는 매일 내가 책을 메쳤다. 그동안 책을 속속들이 파악해
서 책과 씨름할 때마다 매번 이겼다. 상상 속 씨름판에서 책이 어
려운 문제로 밭다리를 걸어도 난 흔들림 없이 정답을 디밀었다.
눈만 감으면 책의 어느 페이지에 무슨 내용이 있고, 그 옆 페이지
에는 뭐가 있는지까지 자동으로 떠오를 정도였다. 책을 완벽하게
다 숙달했다고 확신하고 시험장에 들어섰다. 그러나 웬걸. 시험
문제를 푸는데 얼음 조각이 등줄기를 훑었다. 분명히 책을 다 외
웠는데 내가 모르는 문제가 있었다. 사과나무를 가장 잘 수정시
키는 벌에 관한 내용은 없었는데?
시험장을 나오면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멘탈
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한번 들기 시작한 불안감은 깨진 아이폰
액정의 금처럼 조금씩 커졌다. 그렇지만 그동안 공부한 날들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불안감을 애써 외면했다. 발표 당일. 불길
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고 금이 잔뜩 가
있던 내 멘탈은 와르르 무너졌다. 불합격이었다.
간신히 자리에 다시 앉기까지 한 달쯤 걸렸다. 자리에 다시 앉
기도 힘들었지만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내 공부 방법이 잘못되었을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방법 안에서는
최선을 다했다. 정말이었다. 커피 가루를 삼켜가며 위에 구멍이
나기 직전까지 공부했다. 그렇지만 모르는 문제가 있었고 시험에
떨어졌다.
2년의 세월 동안 학원도 동영상 강의도 듣지 않고, 물어볼 학교
나 선배도 없이 홀로 공부했다. 때때로 시행착오를 겪을 때면 노
력으로 메꾸면 된다고 여기며 더욱 책에 덤벼들었다. 책이 무섭
게 느껴지는 날에도 줘 터질지언정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불안
할수록 더 파고들었고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내가 떨어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다 걸어가는 편한 길이 있는지는 모르
지만 내가 선택한 길로 가도 반드시 합격에 닿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괴롭고 힘든 날들을 견딜 수 있었던 건 내 방법에 대한
믿음과 내가 쌓아 올린 하루들이 얼마나 단단한지 잘 알았기 때
문이었다. 몸과 마음이 깎여나가는 수험생활 동안 나는 내가 날
카로워진다고 생각했다. 깎여 나가는 만큼 예리해져서 누구보다
깊이 파고 들어가 합격에 닿을 거라고.
그러나 불합격은 나를 꺾어버렸다. 나는 날카로운 만큼 쉽게 부
러졌다. 내가 믿어왔던 것을 믿지 못하게 됐고 그동안 쌓아 올린
하루들이 어딘가 물렁물렁해 보였다. 쌓는 방법도 완전히 잘못된
것 같았다. 자리에는 앉았지만, 한동안은 책을 펴지 못했다. 대신
공부 방법에 관한 책을 읽거나 공부 방법을 끊임없이 검색했다.
내 공부 방법을 못 믿게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