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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숲 Aug 10. 2019

매일 저울대에 오른다

나는 프리랜서로서 항상 누군가에게 선택을 당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다 다큐 프로그램 막내작가로 일하면서 카메라 감독, 프리뷰어, 번역가 등 여러 프리랜서들을 '선택'하거나 '고용'하는 입장이 되어볼 수 있었다. (물론 당시 나도 프리랜서였지만, 또 다른 프리랜서들에게 일을 나누어주고 그 결과물을 관리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역지사지라는 말이 있듯 그들을 고용하는 입장이 되면서 배운 것들이 많다.


다큐 촬영을 하면 영상물들은 ‘프리뷰’를 맡겨야 했는데, 영상 분량이 꽤 많아서 매번 여러 명의 프리뷰어들을 섭외해 분량을 나누어 부탁해야 했다.   

('프리뷰'란 영상에 찍힌 내용을 텍스트로 옮겨 적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해, 영상 속에서 사람이 하는 말이나 장면의 변화, 소리 등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문서에 그대로 받아 적는 것이다. 이 작업을 하는 사람을 '프리뷰어'라고 한다.)


내게 업무 인수인계를 해 준 동료 작가는, 우리 프로그램의 일을 고정적으로 맡아주는 프리뷰어 리스트를 뽑아주면서, 그중 일을 잘하는 프리뷰어들이 누구인지 집어 주었다.

우리 프로그램에는 여러 명의 메인작가들이 있었는데, 그분들 중 특히 '프리뷰'에 까다로운 메인 작가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분들과 일할 때는 반드시 정해진 프리뷰어만 써야 한다며 빨간색으로 동그라미 표시를 해주기도 했다.


영상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 적기만 하면 되는데, 프리뷰어를 가려 쓸 정도로 작업물에 큰 차이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실제로 일을 해 보니, 사람마다 결과물이 확연히 달랐다. 일하는 스타일도, 결과물의 퀄리티도 달랐다. 누구에게 프리뷰를 맡기느냐에 따라 업무가 수월해지기도 하고, 오히려 더 힘들어지기도 했다.


만약 마당에 빨간 대야가 놓여있는 컷이 있다면, 누군가는  '# 대야'라고 간단하게 쓸 수도 있지만 다른 누군가는 '# 마당 한편에 놓인 낡은 빨간 대야'라고 쓸 수 있다. 또 영상 속에 등장인물이 있을 때  '노란 옷', '경찰 1'이라고 쓰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름을 파악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선 최대한 그 이름을 넣어서 써 주는 사람도 있다.

다큐 한 편을 촬영하고 나면 영상물의 양은 엄청나게 방대하다. 그렇다 보니 프리뷰어가 꼼꼼하게 잘 체크해서 기록해 줄수록 그만큼 작가와 피디들은 영상을 검토하거나 편집하는 일이 편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일을 수월하게 만들어 주는 프리뷰어에게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일을 맡기게 됐다.

일을 잘 하는 사람은, 어쩌면 결국 같이 일하는 사람의 업무를 수월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카메라 감독들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감독들의 역량은 인물에게서 인터뷰를 잘 이끌어 내는지, 화면 구도를 안정적으로 잘 잡는지가 중요하게 여겨졌다. 또 무조건 많은 양을 찍는 것보다 방송에 쓸 만한 '알짜' 내용만 잘 촬영하는 것도 중요한 능력으로 여겨졌다. (분량이 너무 많으면 나중에 영상을 편집하거나 검토할 때 시간만 많이 낭비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어떤 카메라 감독이 잘 찍는 것인지 잘 몰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주 ‘콜’을 받는 감독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어떤 감독들은 촬영한 영상을 보고 있으면 아직 편집을 하지 않은 상태인데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흥미로웠다. 출연자와 금세 친해져 그들이 속 얘기를 술술 꺼낼 수 있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고, 깨알같이 재미있는 포인트들을 놓치지 않고 화면 속에 잡아냈다.

모두가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그런 감독님들은 매주 고정적으로 섭외가 되었다. 그분들이 다른 일정으로 섭외가 되지 않을 때에만 다른 감독들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나는 작가들 역시 결국 그들과 다르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일을 맡기 전에는 언제나 누군가의 저울대에 올라야만 한다는 것을.

그들의 평가에 따라 먼저 선택받거나 선택받지 않을 수 있음을. 때론 일이 많은 다른 프리랜서가 일을 사양했을 때 그 일이 '어쩔 수 없이' 내게 주어질 수도 있음을.

그리하여, 프리랜서의 삶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능력'과 ‘센스’라는 무게추를 달아야만 한다는 아주 당연한 진리를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일까. 내가 일을 하면서 가장 기쁜 순간은, 내게 일을 한번 맡겼던 사람이 다시 한번 일을 맡기고 싶어 전화를 걸어왔을 때다. 일이 연속적으로 맡겨지느냐 아니냐는 곧, 내가 했던 과거 작업물에 대한 적나라한 성적표이자 인사고과 평가인 셈이다.


사실, 최근 나는 고정적으로 하던 일을 몇 가지 그만두게 되었다.

담당자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 어두운 목소리로 '지금 통화 괜찮으시냐'라고 물었다. 그러고는 회사 내부에 이슈가 생겨 콘텐츠 제작을 잠시 중단하게 됐다고 말했다. 며칠 후 또 다른 회사의 담당자가 전화를 걸어왔고,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둘 다 갑작스러운 통보였다. 비슷한 시기에 일이 두 개나 중단되니 좀 당황스럽고 시무룩한 기분이 들었다. 고정 수입이 되어주던 일인 데다, 그중 하나는 각별한 애정을 갖고 4년이나 해온 콘텐츠였기 때문이다.

담당자들은 하나같이 '일이 재개되면 꼭 다시 연락을 주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 말에 나는 희망과 불안을 함께 느꼈다.


이 일은 재개될 수 있을까? 재개 된다면, 그들은 내게 다시 연락할까?


나는 또 한 번 저울대 위에 올라갈 시간이 되었음을 직감했다.

프리랜서로 살다 보면 더 자주 맞닥뜨리게 될 순간들. 이럴 때 불안보단 자신감을 느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닌 근거 있는 자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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