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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투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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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Aug 30. 2021

[투병일기] 무너지는 순간

우울증 환자의 투병일기




어느 순간은 내게 힘을 주고, 어느 순간은 내 모든 힘을 빼앗아 간다. 어느 순간은 우울함 속에서 허덕이고, 어느 순간은 이유 없이 흥분하기도 한다. 그 어느 순간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찾아오고 나를 헤집어 놓고 홀연히 빠져나간다. 한 마디로 순간이 나를 지배한다. 


내가 앓고 있는 병은 이러한 순간들이 나를 괴롭히는 병이다. 저녁의 한 순간은 나를 우울하게 만들고 낮의 한 순간은 나를 흥분시킨다. 아침의 한 순간은 내 모든 힘을 빼앗고 밤 중의 한 순간은 근거 없는 용기를 준다. 갑작스레 들어오는 용기는 뭐든 다 해 낼 수 있는 사람처럼 만들지만 사실 실체 없는 망상이다. 아침이 되면 다시 겁쟁이로 돌아간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내 기분은 좀 편해질 까. 적당한 우울함을 느끼며 가끔은 적당히 흥분할 수는 없을 까. 


치료 초반에는 적당한 우울함 따위 생각하지도 않았다. 분명히 몇 달만 치료하면 고쳐질 병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커피를 줄이고 약을 제 시간에 챙겨 먹고, 매주 상담을 하면 건강한 생활로 돌아 갈 거라 생각했다. 

치료 중반에는 돌아갈 수 있는 건강한 생활이 없다는 것을 깨 달았다. 정신과에 오기 전 건강했다고 생각했던 내 삶은 착각이었다. 건강한 생활이 아니라 버티는 삶에 가까웠다. 그러니 버티는 삶으로 돌아가는 것에 불과했다. 물론 기쁘고 즐거운 날도 있었다. 하지만 건강한 삶은 아니었다. 그보다 우울한 날이 더 많았고, 삶보다 죽음을 생각하는 날이 더 많았다. 공부를 한다고 버텼고, 일을 한다고 버텼다.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버텼고, 웃음을 짓기 위해 버텼다. 웃고 싶어 웃는 날보다 웃기 위해 웃는 날이 더 많았다.

애초에 건강한 삶이 없었다는 걸 깨닫고는 완치는 꿈꾸지 않았다. 치료 중반이 지날수록 적당한 우울함을 유지하고 싶었다. 그 이상 깊어지는 우울을 막고 싶었다. 적당하면 충분할 것 같았다.


하지만 적당한 우울은 없다. 

순간에 따라 우울은 깊어지고 배 속을 파고 들어와 고통을 주고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조금 많이 웃은 순간 뒤에는 꼭 그만큼 울었다. 순간은 적당한 우울을 비웃었다. 나에게 많은 순간들이 지나친 우울이다. 대학병원에 가기로 결심한 건 그 순간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하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조절할 수 없었다. 우울한 순간을 붙잡고 잠깐 멈춰 세울 수도 없었고, 기다려 달라고 애원해도 안 되고, 온몸을 감싸는 무기력 때문에 서서히 나락으로 빠지는 우울감을 제어할 수 없었다. 


그럴수록 스스로 일어날 수 있다는 마음은 줄어들고, 줄어든 마음만큼 무언 가에 기대고 싶은 심리는 커졌다. 처음에는 내가 다니던 동네 정신과 선생님을 의지했고, 또 약에 의지했다. 하지만 발버둥 치듯이 기대는 무언가는 금세 무너지기 마련이다. 의지하던 약은 별 효과를 못 봤고, 의지하던 선생님은 여기서는 더 이상 치료가 어렵다는 말을 했다. 반년 간 꾸준히 먹은 약이 아무 소용없다는 걸 알고 그 후로 약을 받아와 그 약봉지를 대충 구석에 구겨 넣고 먹지 않았다. 약에 대한 배신감 보다는 그냥 귀찮았다. 매일 물을 따르고 제 시간에 약을 꺼내 먹던 것도 귀찮아졌다. 아무 소용이 없다고 느꼈으니 귀찮아서 약을 먹지 않아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한 동안 약을 먹지 않았다. 



딜레마에 빠졌다. 

약을 먹어도, 먹지 않아도 불안하고 초조하고 우울했다. 초조함에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을 것 같아 불안했고, 약을 먹지 않으면 먹지 않는 내 상황에 불안함을 느꼈다. 점점 쌓이는 약봉지는 그냥 버리지도 먹어 치워버리지도 못했다. 구석에 널 부러져 있는 약 봉지는 내 감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널 부러진 약봉지 수만큼 우울과 불안이 방치되었다. 그 순간에는 답이 없어 답답했다. 간혹 이럴 때면 나는 뿌연 공기 속을 헤매는 듯 눈을 떠도 감은 기분이었다.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상황은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 모든 것에는 불안한 내 감정과 현실, 가족, 미래. 정말 모든 것이 있었다. 나는 먼저 감정을 놓기 시작했고, 그 다음엔 현실을 놓기 시작했다. 더 이상 잘 살기 위해 무언가 애를 쓸 힘 조차 없었다. 뿌연 공기 속을 헤매던 나는 결국 그냥 눈을 감기로 했다. 눈을 감은 세상과 뜬 세상에는 별 차이가 없으니. 정말 언젠가 눈을 다시 뜨게 된다면 그 세상이 눈을 감은 세상 보다는 조금 더 밝기를 바라며 모든 것을 포기했지만 그럼에도, 미미한 희망만을 남겨 두었다. 






불안장애와 만성 조울증을 갖고 투병하고 있습니다.

가끔의 감정과 치료과정을 적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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