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게으른 여행자 Apr 12. 2021

나의 싫어하고 좋아하는 곳

우리는 각각 다른 곳에서 출발해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간다. 나이나 성별은 물론 소득이나 건강, 지적 수준도 제각각이다. 대부분은 있는 듯 없는 듯 잠시 조그만 공간을 차지했다 사뿐히 떠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다. 이곳에서 돌출되는 건 주로 어떤 이의 취약함이다. 불편한 몸으로 엉거주춤 서 있다가 기사의 호통을 듣고야 마는 노인부터 안내 방송이나 노선도를 체크하지 못하고 정거장마다 기사에게 자신의 목적지가 아닌지 확인하는 중년, 믿어지지 않겠지만 가끔은 돈을 안 내고 타려다 망신당하는 사람도 본다. 

내가 자주 타는 버스, 03번 마을버스 이야기다. 03번은 노숙인이 눈에 띄는 지하철 1호선의 한 역 근처부터 집값이 많이 오른 아파트촌까지 운행한다. 우리 집에서 지하철역까지는 다양한 루트로 가지만 마지막엔 03번의 도움을 받아야만 일하러 갈 수 있다. 버스를 기다리는 것까지 포함해도 03번에 있는 시간은 10분에서 길어야 20분을 넘지 않지만 이곳에서 나는 다른 곳에서 보고 듣지 못하는 일을 꽤 많이 본다. 

     

마음먹고 어딘가로 떠나지 않는 이상 내 생활 반경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고만고만한 사람들하고만 부딪힌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로 엮여 다양한 분야의 사람을 만나긴 하지만 불쾌한 이질감을 느낄 일이 많지는 않다. 좋은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은 사회적 자아가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정기적으로 보는 방송팀 동료들 또한 같은 미션을 완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니 교집합이 뚜렷할 테고 오다가다 마주치는 아파트 이웃도 똑같은 구조의 거실과 방, 그리고 집 값이라는 강력한 일치감 속에 작은 연대감을 느낄 수 있다. 글 쓰러 다니는 카페나 도서관에서 만나는 사람들 간에도 느슨한 교감이 오간다. 한낮에 일터가 아닌 곳에서 사부작이 앉아 뭔가에 몰두하는 저이가, 동네 이웃이나 동료보다 어쩌면 나와 더 비슷할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을 목격하고 사소한 일로 큰 소리가 오가는 버스는 그러므로 내 일상의 평온을 위협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게다가 나는 옆에서 나와 상관없는 싸움이 벌어져도 가슴이 두근두근 대는 쫄보란 말이다.) 상냥한 점원이 반기는 백화점과 쇼핑몰, 몸과 마음을 건사할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지녔음직한 이들이 찾는 공원이나 뒷산과는 전혀 다른, 내 완벽한 하루의 오점과도 같은 공간이 바로 버스였다. 정신 건강을 위해 돈을 모아 자가용부터 사겠다고 다짐하던, 의기양양했던 날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나는 아직 버스를 끊지 못했는데, 어쩌면 이런 날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날도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날이었다. 03번에 올라탄 뒤 빠른 걸음으로 목표한 좌석을 향해 다가가 앉으려는데 어디선가 나타나 좌석에 먼저 밀려드는 엉덩이가 있었다. 역시 늘 보던 그대로인 버스 안 풍경이다. 엉덩이의 주인은 50대쯤 되었을 아줌마였다. 최대한 경멸하는 태도를 담아 아줌마 앞에 손잡이를 잡고 버티고 서있자니 이번엔 커다란 보따리 두 개를 가진 할머니가 놓칠세라 급히 버스에 오르는 게 보였다. 짐까지 가진 노인이 마음이 앞서면 열에 일고여덟은 버스 기사 호통의 타깃이 될뿐더러 크게 다칠 가능성도 있었다. 내가 할머니 짐을 받아 옮겨야 되는 걸까, 자리도 없는데 어디로 옮기란 말인가? 따위를 느긋하게 따지는 사이 내 자리?를 빼앗았던 침략자가 벌떡 일어나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할머니의 짐을 뺏어 들더니 자기 자리로 옮기는 게 아닌가. 할머니는 연신 고맙다 했고 아줌마는 마침 앞 쪽에 앉아있던 젊은이들에게 들리도록 크게 말했다. “거 할마이가 낑낑대면 도와줘야 될 것 아뇨!”   

나는 경멸의 표정을 지운 채 어느덧 같은 편이 되어 든든한 아줌마 곁에 나란히 선다.      


한산한 한낮의 버스는 또 어떤가. 이때의 버스는 나를 세상 속에 실어다 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상으로 데려다준다. 버스 속의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며 무엇을 향해 가는지 밝히라는 세상의 요구에 단 세 글자로 대답할 수 있다. ‘버스야’. 신기하게도 어디 가는 길이냐고 까지 묻는 경우는 별로 없다. 버스에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러므로 별로 할 일도 없는 버스에서 나는 점점 더 유능한 관찰자가 된다. 창문이 훑고 지나가는 세상을 재빨리 눈에 담았다 흘려보낸다. 또렷이 대비되는 쇠락함과 번화함을 본다.   

    

버스를 싫어하고 좋아하는 내게 분명한 사실은 내 삶은 그곳에도 있었고, 그러므로 그곳에서도 배웠다는 것이다. 미숙하거나 취약할지언정 삶을 내팽개치지 않는 법을, 앉을자리를 놓고 다투면서도 인간답기 위해 애쓰는 법 같은 것들을 말이다. 때로는 출근길 덜 마른 머리칼에서 배어나는 샴푸 냄새에서 수없이 배반당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오늘에 걸어보는 희미한 기대들을 감지하기도 한다. 

동료들과 어울려 초밥을 집어먹는 고급 일식집과 오가는 고성 속에 눈을 질끈 감는 버스통 중에 나와 더 어울리는 곳이 어딘지는 모르겠다. 아무 의미 없는 질문이려나. 그래, 이제 이런 질문은 그만할 때도 된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열두 개의 우정들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