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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여행자 Jul 08. 2021

지금만 가능한 사랑

모든 사랑은 유일하고 유한하다.

눈썰매, 놀이공원 퍼레이드 구경, 공지천 오리배와 경포호 자전거... 모두 서른세 살이 넘어서 처음 경험해본 것들이다. 마트에서 코코넛을 통째로 사다가 칼로 이백 번쯤 두드려 깬 다음 그 물을 받아 마시거나 한여름에 팔이 빠지기 직전까지 계란 흰자를 저어 머랭 만들기처럼 두 번은 하고 싶지 않은 일도 있고 한밤중에 달 보며 수영하기처럼 살면서 가장 좋은 기억 중 하나로 남은 것도 있다.     

 

모두 이윤호와 함께 한 것들이다. 우리는 함께 한 처음이 많다. 이윤호는 열 살짜리 내 조카로 우리는 서른두 살 차이가 난다. 윤호가 두 돌 무렵 우리 집에서 1분 거리로 이사 오면서부터 나와 친하게 지냈다. 윤호와의 시간은 죽이 맞는 친구와 함께 할 때처럼 좋다. 피곤하기도 하지만 원래 모든 인간관계에는 에너지가 들지 않나.      


윤호의 엄마인 우리 언니는 회사 일에 부업까지 하느라 프랜서인 나에 비해 시간을 내기가 어려운 편이다. 언니는 자기 대신 윤호와 놀아주는 내게 고맙다며 금전적 지원으로 마음을 보여주는데 언제부턴가 언니의 마음을 받을 때  조금 찔리는 기분이 다. 윤호가 커가고 우리가 함께 해본 일이 늘어갈수록 내가 윤호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잘 들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이 많고 결정이 느린 나와 달리 윤호는 원하는 것이 정확한 편이다. 편의점에서 과자 한 봉지를 골라도 장고에 들어가는 나와 달리 윤호는 빠르고 정확하게 원하는 걸 고른 뒤 후회 없이 해치운다. 원치 않는 것을 갖는 법이 없고 원하는 것은 얻을 때까지 집요하다. 따라서 나는 윤호와 함께할 때 발생하는 수많은 의사결정의 순간 윤호의 의견에 매우 의지하는 편이다.     

 

윤호와 에버랜드에 간 날, 난이도 최저라는 회전목마조차 위아래로 움직이는 말보다는 고정된 말을 탈만큼 쫄보인 우리라 몇 가지 유아용 놀이기구를 타고나니 더 이상 탈 것이 없었다. 차가 막히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자는 내게 윤호는 유튜브에서 본 야간 퍼레이드를 직접 봐야 한다고 말했다. 꽤 피곤했지만 결국 우리는 퍼레이드 라인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공연은 한참 뒤, 하늘이 어두워진 뒤에야 시작됐다. 윤호와 나도 화려한 축제의 분위기에 섞여 들었다. 내 상상보다 퍼레이드 규모는 훨씬 컸고 배우들의 숙련도도 돋보였다. 축제 통에 놓칠세라 윤호의 작은 손을 꼭 잡은 채 얼마쯤 봤을까, 어둠 속에서 나는 글쎄 조금 울고 말았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불빛들과 그걸 즐기는 사람들 틈에서 어린 시절의 내게도 이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왈칵 밀려들었다. 내가 어릴 땐 지금처럼 서민들도 풍족한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던 데다 늘 피곤해하는 부모님을 졸라 다양한 경험을 해볼 주변머리도 내겐 없었다. 어린이였던 내가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동시에 얼마나 많은 바람이 내 안에서부터 좌절당했는지 까맣게 잊은채 너무 일찍 어른의 몸을 갖게 된 건 아니었을까.      


윤호와 함께 놀 때 나는 자꾸만 어린이로 돌아간다. 윤호가 나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현명한 어른이라서가 아니라 눈높이가 맞아서, 그러니까 수준이 비슷해서일 것이다. 윤호와 함께하는 순간만큼은 모험해보고 싶은 마음을 누를 필요도 좌절당할 일도 없다. 신체적 안전에 대한 염려가 다른 관심에 비해 무척 컸던 나의 엄마가 아닌 어른이 된 내가 어린 나를 돌보기 때문이다. 윤호에게 좋은 이모가 될수록 나는 내 안의 어린이에게 좋은 엄마가 되어가고 있다.      


사랑을 줄수록 왜인지 조금씩 자라는 내 안의 어린이가 완전히 클 때쯤, 윤호도 많이 자라 있을 것이다. 사춘기라는 인격의 돌변 가능성 또한 도사리고 있다. 따라서 지금 윤호와 나의 사랑은 오직 지금만 가능한 사랑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랑이 그렇지 않을까. 지금에 가장 알맞은 사랑, 두 번 다시 똑같이 경험할 수는 없는 사랑 말이다. 앞으로의 우리는 또 그때만의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오늘의 안전한 사랑과 자라남의 기억으로 앞으로도 누군가를, 무언가를 계속 사랑해나갈 수 있을까?       


아기 때부터 각종 열차를 좋아하던 윤호가 올여름 방학엔 KTX 말고 못 타본 새마을호를 타고 부산에 가자고 했다. 해운대, 광안리, 아쿠아리움 따위를 추천하는 내게 윤호는 뜻밖의 로망을 밝혔다. “괘법르네시떼역이라고 이름이 정말 웃기는 지하철역이 있대!” 고작 이름이 신기하단 이유로 그 멋진 부산까지 가서 지하철역에 가보자는 윤호의 제안이 나는 정말 못마땅하지만 올여름 아마도 우리는 괘법르네시떼역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을 것이다. 지금만 할 수 있는 사랑을 아끼고 싶지 않아서인지 부산에 가본지 오래됐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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