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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여행자 Sep 17. 2021

책상을 고르며

책상과 함께 다시 떠안은 내 삶

작업실을 새로 마련하면서 요즘 가구 고르기에 푹 빠져 있다. 처음엔 6인용 테이블을 들이려고 했었다. 커다랗고 튼튼한 나무 테이블에서 밥도 먹고 책도 보고 공부도 하고 한 귀퉁이에는 모니터를 설치해 글쓰기 작업을 하면 어떨까 하고.       


그러다 최근엔 단독 책상을 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짤막한 에세이뿐 아니라 줄거리가 방대하게 이어지는 장편으로까지 쓰는 종류가 확장되면서 들춰봐야 할 자료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떤 구간은 반드시 손글씨를 끄적여야만 돌파할 수 있는 아날로그 형 인간인지라 용도에 맞는 노트와 필기구 또한 한 짐이다. 미팅과 식사, 독서 등 끙끙대며 쓰기와는 성격이 다른 일들은 공간을 분리하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책상 탐색. 가격대부터 재질, 인테리어 콘셉트에 따라 천차만별인 것이야 당연할 테니 내가 포기할 수 없는 요소를 추려보기로 한다. 우선 나무로 된 것이어야 하며 필기구를 분류해서 보관할 서랍이 있어야 한다. 또한 책상의 끝에는 물건을 밀어도 떨어지지 않도록 얕은 지지대가 있었으면 한다. 고로 식탁으로 써도 무방한 모양의 것은 탈락. 또 벽을 향하도록 배치하지 않아도 되도록 책장이 세트로 세워져 있는 형태 여서도 안 된다.        


이렇게 몇 가지 기준을 세운 뒤 발품을 팔기 전 인터넷에서 수많은 책상들을 서치 했다. 내가 원하는 형태의 책상들은 클래식한 제품군에 속해서 그런지 비싼 편이었다.(철제 제품들이 상대적으로 저렴했다.) 그날도 잠자리에 누워 작은 스마트폰 속에서 나만의 책상을 찾아 헤맬 때였다. 그리고 한 제품 사진에서 나는 부지런히 스크롤을 내리던 손가락을 멈추어야 했다.      


십 년 전쯤일까, 꼭 사고 싶어서 스크랩까지 해두었던 책상을 발견한 것이다. 이렇게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자작나무로 만들어진 책상으로 초콜릿에 가까운 어두운 갈색에 수작업 도장으로 마감된, 백만 원이 훌쩍 넘는 고가의 제품이었다. 책상에 대해서만은 취향이 별로 변하지 않았구나.      


그런데 서른몇 살 때 골라둔 이 책상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그때 만나던 남자 친구였다. 결혼을 하게 된다면 도면 작업이 잦았던 그에게 꼭 어울리는 그 책상을 우리의 서재에 두고 싶었다. 거기 앉아서 책 보고 일하는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 무렵 내 방엔 삼만 얼마 주고 산 철제 조립 책상이 삐그덕 거리고 있었고 그나마도 의자가 높다는 이유로 거의 앉지 않았더랬다. 나는 왜 내 책상을 사야겠다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왜 의자의 높이를 내 키에 맞게 조절하지 않았을까. 왜 내게 꼭 맞는 책상에 앉아 공부하고 글을 쓰겠다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얘기했던 버지니아 울프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여성이 남편의 내조자가 아니라 자기 재능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이제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가 되었는데. 그 시절의 나는 그렇게 어수룩했더랬다.       


작년에 나는 에세이집을 한 권 냈는데 그중 내 작업실, 내 책상 같은 나만의 공간에서 쓰인 글은 한 편도 없다. 모두 카페나 도서관, 호텔 방을 떠돌며 썼다. 그때는 그런 환경이 마음에 들었다. 글을 써서 책을 내는 일이 생업이 아닐 때였다. 책이 잘 되면 좋고 아니면 그냥 내 이름으로 책을 한 권 가지니 좋다고 생각할 때, 글쓰기는 내게 세련된 취미 정도였다.      


누군가의 공간을 빌어 글을 쓸 때 가장 좋은 건 적당히 긴장감 있게 시간과 밀당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커피 한 잔엔 두 시간에서 길면 세 시간, 호텔 1박엔 20 시간쯤의 시간을 사는 셈이 된다. 그것을 의식하지 않을 리 없는 나의 뇌는 휴식을 위해 흘려보내는 시간조차 의식적으로 배치하여 일 한다. 산뜻하면서도 능률적이다.        

그에 비해 나만의 책상이 주는 느낌은 절실함에 가까울 것이다. 이 작은 공간에서 하는 일이 일상과 분리될 수 없는, 내 삶을 지키기 위한 작업이라는 감각 말이다. 파리 여행 중에 본, 프랑스 대문호 발자크의 책상이 잊히지 않는다. 생전 대표적인 생계형 작가 중 한 명이었던 그의 작업실엔 별로 크지도 않은 나무 책상과 큰 창 하나가 전부였다. 그에게 책상은 때때로 지리멸렬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생활고로부터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한 사투가 벌어지는 작은 전장.      


나는 책상과 함께 내 삶을 누구에게 맡기고 싶었던 걸까.       


그나저나 작업실 입주일이 다가오고 있는데 예산이 안 맞아 아직 책상을 고르지 못했다. 예전에 골라둔 그 멋진 책상의 반의 반 값에서 타협을 보려니 마음이 쓰리지만 어쩌랴.   

발자크의 책상,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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