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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여행자 Feb 21. 2022

끝과 시작

이별에서 배운 것

그렇게 노심초사했건만, 밤사이 또 일이 벌어졌다.      


창가에 놓인 자그마한 화분 주변에 통통한 이파리들이 점점이 떨궈져 있었다. 오늘은 가지째 숭덩 떨어져 나온 것도 보인다. 아침부터 마음이 아리다. 우리 집 둘째 아악무 이야기다. 아악무는 작은 다육식물로 핑크색 꽃을 피우는데 크기만 작을 뿐 형태가 벚꽃나무를 닮은 예쁜 나무다.      


우리 집에는 세 종류의 식물이 있다. 집을 이사하고 나서 들인 순서대로 첫째는 쭉쭉 뻗은 수형과 시원시원 커다란 잎을 자랑하는 여인초. 문제의 아악무가 둘째고, 3년 이상 변형 없이 볼 수 있도록 생화를 보존 처리한 일명 보존화가 막내다.    

  

이중 가장 관리가 쉬운 걸 꼽으라면 생화를 보존 처리해 반영구적으로 박제시킨 보존화일 테다. 이건 관리가 쉬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관리가 필요 없다. 그리고 여인초는 원래 잘 크는 아이라서 인지 몰라도 2주에 한번 물을 주고 창가에서 적당히 햇빛을 받도록 해 주고 하루 한 번씩 환풍을 시켜주는 것만으로도 어찌나 쑥쑥 크는지 집에 들인 지 석 달 도 안됐는데 벌써 분갈이 걱정을 할 만큼 성장력이 왕성하다.      


골골대는 둘째 아악무는 다육식물로 다육이는 일반적으로 기르기 쉬운 식물로 알려져 있다. 통통한 이파리 안에 수분을 가득 머금고 있어서 물을 자주 줄 필요도 없는 데다 적당한 빛과 바람만 있으면 잘 죽지 않는다. 그래서 잔 손 가지 않게 잘 자라준 첫째와 똑같은 환경에서 마음 놓고 길렀는데 언제부턴가 자고 일어나면 이파리를 후드득 떨구며 서서히 말라가고 있다. 커다란 여인초 이파리의 그늘에 가려 빛을 못 받는 건 아닌가 싶어 자리를 이리저리 옮겨보았지만 어디에 두어도 이파리를 계속 떨구어냈다. 키도 전혀 자라지 않았다.    

  

문득 이사 오기 전까지 식물을 한 번도 들이지 않았던 이유가 떠올랐다. 아마도 끝을 보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꽃을 좋아해 한 다발, 몇 송이씩 사다가 장식해본 적은 많지만 늘 끝이 아쉬웠다. 다만 꽃집에서 사 오는 꽃이라는 게 엄밀히는 편의를 위해 이미 생명을 몰수당한, 오로지 관상용으로 단 며칠의 짧은 유희를 위한 것이라는 암묵적 동의가 깔려 있기에 덜 슬펐을 뿐.


이사 온 뒤로 생화를 들이기보다 보존 처리한 꽃을 열심히 구한 것도 끝을 겪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보존화는 시들지 않고 물을 갈거나 빛을 보여줄 필요도 없으니 얼마나 신세계인가. 그런데 내 침대 옆 협탁에 놓인 보존화를 나는 왜인지 거의 들여다보지 않는다. 오늘 컨디션이 어떤지, 하다못해 하룻밤 사이에 또 얼마나 시들었을지 노심초사하며 살핀다던가 언제쯤 내다 버려야 할지조차 가늠할 필요가 없으니. 그것은 아쉬운 끝이 없듯 시간의 변화에도 무감한 어떤 것이었다.      


‘생명이 없는 것은 죽을 수도 없구나.’      


죽을 수 없다는 건 하루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뜻과도 같다. 이 당연한 사실을 나는 매일매일 똑같은 보존화를 보며 다시 한번 느꼈다. 죽음은, 끝은 살아있음의 당연한 결과요 살아있었음의 분명한 증거일 뿐이라는 사실을.       


지난 계절에 나는 참 많은 것들과 이별했다. 나를 믿어준 동료들을 여럿 보내야 했고 20년 지기 친구가 등을 돌렸다. 한순간도 의심치 않던 가족과 멀어졌으며 사랑을 붙잡지 못하고 속절없이 흘려보내야만 했다. 그 가운데서 많이도 앓았다. 한동안 낮도 밤도 모르고 몽롱하게 앓는 동안 나는 아마도 다시는 끝이 있는 무엇도 시작하지 말자고 의식과 무의식을 모두 동원해 다짐했을지도 모른다. 앓고 나서 한결 개운해진 채 모든 게 시시하고 가볍게 느껴진 걸 보면.      

하지만 지금, 침대 옆에 놓인 노란색 보존화를 물끄러미 보면서 생각한다. 앞으로도 내 집에선 꽃이 시들고 이파리가 떨어지고, 식물은 말라갈 것이라고. 나는 그런 사람일 수밖에 없다고. 집 밖에선 계절이 바뀌고 언젠가 노래한 지난 계절 사랑의 시들도 잊힐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의 계절만을 골라서 살거나 사랑의 시를 더 이상 되뇌지 않는 날들을 살 수는 없는 사람이라고. 만났으니 헤어질 뿐이며 사랑했기에 보낼 수 있는 거라고 그저 중얼거려보는 수밖에는.     

     

그러니까, 곧 떠날지 모를, 그러나 아직 떠나지 않은 모든 것을 영원처럼 열심히 사랑하는 수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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