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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여행자 Feb 16. 2022

나의 하얀색 운동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운동화는 나이키 에어포스 화이트 컬러로 2년 전 내 생일을 맞아 스스로에게 선물한 운동화다. 특별한 모델은 아니지만 워낙 스테디셀러라 사이즈를 아무 때나 구하기는 어려운 모델이었다. 생일 즈음 평소 잘 안 가던 매장을 찾았을 때 마침 230 사이즈 하나가 남아 있었는데 매장 진열 상품이었다. 나는 운동화의 경우 대개 235 사이즈를 신지만 이건 230도 불편할 정도는 아니기에 선택의 여지없이 데려오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디피 상품을 구입하겠다고 하자 점원은 지점장인 듯한 사람을 데려왔다. 지점장은 처음에 구입을 말렸더랬다. 진열되어 있던 왼쪽 한 짝의 발목 천 부분이 생활 오염에 따라 약간 누렇게 변해 있었고 그건 세탁으로도 지워지지 않을 거라는 이유였다. 디테일에 그다지 민감하지 않은 나는 되물었다.      


"어차피 신다 보면 나머지 한쪽도 이렇게 되는 것 아닌가요?"

"이보다 더 더러워지겠죠."

"그럼 됐습니다. 대신 조금 싸게 주세요."       


지점장은 잠시 고민하더니 10% 싼 값에 진열 상품을 내주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운동화를 바꿔 신고 날을 듯 가벼운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진열대에 있던 에어포스가 내 것이 된 순간부터 뜻밖에도 에어포스를 향한 나의 집착이 시작됐다. 왼쪽 발목의 오염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던 나를 자극한 건 운동화 혀 부분과 끈 매듭 부분에 남색 잉크가 물든 듯한 흔적이었다. 다급해진 나는 원인을 찾기 시작했고 싸구려 트레이닝복 바지가 범인으로 지목됐다. 그다지 어렵지 않은 추리였다. 바지에 물 빠짐 현상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으리라. 황급히 바지를 내다 버렸다. 에어포스뿐 아니라 내 다리 피부에도 얼마나 잉크를 스며들게 만들었을까. 하얀색 운동화 덕분에 불량 옷을 가려낼 수 있었으니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시간 앞에 변하지 않는 게 있을까. 에어포스는 고무 재질이라 그런지 전반적으로 쪼그라들 듯 낡아갔다. 흙이 튀어 어디 한 군데를 닦아내거나 누렇게 변해 표백을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마치 세월에 따른 인간의 노화처럼 시간이 지남에 따라 늙고 왜소해져 가는 느낌으로 변해갔다. 매일매일 티도 내지 않고 조금씩 서서히 시들어가는 에어포스를 보면서 나는 다시는 하얀색 운동화를 들이지 않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나의 다음 인생 운동화를 찾기 위한 여정이 시작됐다. 에어포스만큼 정 붙일 수 있는 운동화는 무엇일까. 그렇게 몇 개월을 보내며 발견한 운동화는 나이키 데이브레이크. 날렵한 바디에 안정감 있는 굽. 그래 이것이야! 이 제품은 인터넷에도 많아서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오매불망 기다리다 신발을 받아 들고 보니 아뿔싸. ‘이것도 결국 흰색 계열이었지!’ 그걸 모르고 샀을 리는 없지만 막상 직접 받아 들었을 때 ‘써밋 화이트’의 그 병아리 피부처럼 뽀얀 바디를 보면서 나는 한숨을 훅 내쉬었다. 내 취향은 변하지 않았구나. 그러고 보니 그전에 신던 운동화도 거의 모두가 흰색이었다. 애착이 이만큼 크지 않아 한 철 신으면 다른 신발로 바꾸곤 했기에 몰랐을 뿐.      


나는 확실히 하얀색 운동화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 흔한 컨버스도 물론 흰색, 뉴발란스의 어글리 운동화도 흰색, 거슬러 올라가면 성인이 되어 운동화를 즐겨 신기 시작하면서 구입한 나의 첫 운동화, 나이키 루나 글레이드도 화이트였다. 간간이 마음을 다잡고 들였던 검은색 운동화는 몇 번 신고는 어쩐지 신발장으로 들여 넣곤 했다. 그렇다. 하얀색 운동화는 낡아갈수록 아픔을 주지만 포기할 수 없는 나의 확고한 취향이었다.      

얼마 전 나처럼 에어포스를 좋아하는 동료를 만났다. 우리는 에어포스 동지라며 서로 에어포스 찬양을 늘어놓다가 구하기 힘든 제품이라는 하소연에 이르렀다. 그때 평범한 운동화 한 켤레 가지고 저렇게 호들갑이냐 싶은 표정으로 잠자코 듣던 다른 동료가 끼어들었다. “작가님. 여기 많은데요?” 그가 보여준 스마트폰 화면에는 235 사이즈를 바로 주문할 수 있는 결제창이 열려 있었다. 언제 이렇게 물량이 풀렸나.      


논리대로라면 그 자리에서 나이키 에어포스 235를 당장 주문했어야 하지만 어쩐지 나는 여전히 낡고 늙은 230 사이즈의 조금 작은 에어포스를 신고 있다.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마냥 낡아가는 에어포스 나름의 매력이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의 에어포스 동지의 것은 그냥 낡다 못해 왜 그렇게 됐는지 앞부분이 일그러지기까지 했는데 그 모양이 어쩐지 좋아 보였다. 운동화 주인의 개성과 삶이 신발에 담긴 것 같은 느낌. (그 운동화 주인을 내가 좋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것에 비하면 내 운동화는 아직 애송이였다.     


나는 앞으로도 하얀색 운동화를 신을 것이다. 235를 마련하더라도 나의 첫 에어포스 또한 버리지는 못할 것 같다. 내 발과 내가 한 발짝씩 내디딘 걸음에 따라 나만의 모양대로 변해갈 모습이 궁금하다. 새하얗고 똘똘하던 모습이 차츰 변하고야 마는 것을, 낡고 늙어가는 것을 보는 건 마음 아픈 일이지만 그것 또한 그냥 감당하는 사람, 올해는 그런 사람이 한 번 되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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