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화의 디테일은 영화관에 있다고 생각한다. 굳이 영화관에 가지 않더라도 OTT를 통해 집에서 편히 볼 수 있지만, 내게 중요한 게 오직 스토리만은 아니다. 배우의 미세한 떨림, 귓가를 가득 채우는 음악, 큰 화면, 어두운 장소, 편안한 의자까지 오직 영화에 집중하면서 노트북이나 핸드폰 화면으론 도저히 만날 수 없는 그 무엇과 만나게 된다. 사소할 수 있으나 난 그 무엇에 집중하는 사람이라서 굳이 돈과 시간을 써가며 극장에 가는 편인데, 비교하자면, 한 끼 아무거나 빠르게 먹어 배만 부르면 되는 사람도 있고, 자기 몸에 최적화된 음식을 찾아 가장 편안한 장소에서 오랫동안 천천히 먹는 사람도 있는데, 난 후자인 거다. 이건 오직 영화에 관한 거고 밥은 되는 대로 먹는 편이다.
얼마 전, 칸 영화제 황금 종려상과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은 ‘추락의 해부’를 보러 극장에 갔다. 이렇게 좋은 영화에 사람이 거의 없어서 안타까운 마음인데, 영화 종료 10분여를 앞두고 클레이맥스 장면에 갑자기 세 사람이 들어왔다. 아마 다음 회차에 표를 산 사람들 같은데, 하필 중요한 부분에 팝콘을 와작와작 씹으며 여기 앉아라, 저리 앉아라, 시끄럽게 하더니 자리에 앉자, 핸드폰을 꺼내 한 사람은 통화를, 한 사람은 핸드폰으로 뭔가를 본다. 소음과 불빛 때문에 집중이 어려웠다. 영화 내용이야 자막으로 읽었지만, 기껏 올랐던 감정이 와장창 깨지고 나니 마음이 심히 언짢았다. 제발 이런 사람이 없길 바라는 마음으로 본론으로 들어가 영화에 관해 말하자면.
‘추락의 해부’는 어느 날, 남편이 다락방에서 추락해 사망하면서 벌어지는 법정 스릴러 영화다. 자살인가 타살 인가로 시작된 사건은 한 가정을 낱낱이 해부하고 까발리면서 무엇이 진실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매 장면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는 메시지가 있지만, 보이는 것도 믿지 못한다면 대체 무엇을 믿는단 말인가? 그래도 주야장천 보내는 메시지를 읽자면 네가 보는 그것은 코끼리 발일 뿐이다. 코끼리 발만 보고 코끼리를 봤다고 할 수는 없지 않으냐? 단편적인 정황과 진술이 관계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없다는 쉬운 명제를 이토록 정성 들여 말하고 있다. 말은 쉽지만, 막상 보이는 것을 넘어 전체를 이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부부 문제. 육아 문제, 가사 노동 분담의 문제, 둘 다 작가인데 상대의 아이디어를 가져다 발전시켜 쓴 글이 표절이냐 아니냐 하는 첨예한 문제까지, 영화는 처절하게 대립하는 부부를 통해 마구 질문을 던진다. 이 지점에서 고전적인 남녀 역할이 바뀐 것도 흥미롭다. 대체로 아내가 남편에게 가사 노동 분담이나 육아 분담을 요구하는데, 이 영화는 반대다. 굵고 많은 질문이 한꺼번에 쏟아지면서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쁘다. 영화의 속도에 맞춰 나도 내면에서 빠르게 그 답을 찾기 때문인데, 여차하는 순간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 버리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집중해야 한다.
그중 가장 내 머릴 후려친 장면은 영화 중후반 검사가 아내를 추궁하는 장면이다.
“아들에게 사고 난 후 남편을 원망했나요?”
“네, 며칠은요, 그에게 책임이 있으니까요.”
“남편 때문에 아들이 시력을 잃었는데 고작 며칠 원망했다고요?”
“네, 그런데, 아까 선생님(주치의)도 비극적인 상황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난 처음부터 그렇게 보길 거부했어요. 단 한 번도 장애아로 본 적이 없어요. 그런 시선으로부터 지키고 싶었어요. 그렇게 낙인찍자 마자 그렇게 살게 되니까요. 주도적인 인생을 살지 못하죠. 하지만 아이에겐 이 삶이 최고여야 해요. 단 한 번뿐인 나만의 삶이니까요.... 친구들과 SNS 하고 피아노 치고 울고 웃고 아주 활발한 아이입니다.
He`s okay!”
대화 내용으로 유추할 수 있다시피 아들이 남편 때문에 시력을 잃고 시각 장애인이 되었다. 고작 네 살의 나이에. 검사는 남편 살해자로 아내를 기소했고, 그 원인을 파헤치는 장면으로, 아내의 대답에 전율이 일었다. 장애가 있는 자식을 둔 부모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 같은 건데 이건 부모가 아니더라도 장애가 있는 아이를 우리가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명쾌한 해답처럼 느껴졌다.
아내는 바람피운 전력이 있다. 상처받은 남편은 싸울 때마다 그 얘길 끄집어낸다. 아들 사고 이후 자책에 빠져 사는 남편을 보며 아내는 ‘살기 위해’ 누군가 필요했다고 절규한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며. 나는 바람을 옹호할 마음도 비난할 마음도 없다. 내가 옹호하든 비난하든 단군 이래 쭉 벌어지는 일이다. 다만 아내의 입과 표정을 통과한 언어에 설득당했다. ‘사랑이 죄는 아니잖아!’를 뛰어넘는 인간의 본성을 건드린 명장면이었다. (이 장면을 설명할 언어가 짧은 게 한이다.)
최후 진술 대에 오른 아들(12세 남짓)이 말한다.
“아무리 찾아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면 ‘어떻게’가 아닌 ‘왜’에 의문을 품어야 한다.”라고.
인간관계의 핵심을 찌르는 말이다. 상대가 내게 무슨 짓을 하면 우린 ‘네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 질문한다. 그런데 대부분 사건의 본질은 ‘왜’에 들어 있다. 금쪽 상담소에 나오는 수많은 금쪽이가 그러한 것처럼.
단순 사고로 보였던 가정이 낱낱이 해부되면서 수면 아래 잠겨 있던 문제들이 하나씩 드러난다. 문제가 드러날수록 관객은 영화에 빠지게 되는데, 범인은 말하지 않겠다. 직접 확인하시라.
모든 배우가 명연기를 보여준다. 특히 시각 장애인 안내견으로 나오는 개가 ‘찐’이다. 견우주연상이 있다면 무조건 대상인데 아쉽다. 좋은 영화는 영화가 끝나고 다시 시작되는 영화라고 한다. 관객의 입을 통해 다시 만들어지는 그런 영화. 그런 측면에서 이 영화는 좋은 영화다. 두 번 봐도 돈이 아깝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