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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조 Feb 13. 2023

다비드 자맹: 프로방스에서 온 댄디보이

<프로방스의 올리브나무>(Olivier en Provence)

“디스토피아 같은 세상살이에서 불행, 절망, 우울, 냉소, 부정의 미학을 그리기는 오히려 쉽다. 정작 어려운 것은 그 반대를 그리는 일이다.”

“It’s easy to paint the aesthetics of unhappiness, despair, depression, cynicism, and negation. What’s really difficult is drawing the opposite.”

움직임과 아름다움에 대하여 글을 썼던 적이 있다. 아름다운 것은 움직이는 것이며, 그렇기에 움직이는 것을 쫓아 움직이는 나의 모습 또한 아름다워지는 것이라고. 우연히 다비드 자맹의 전시에 들리게 되었다. 계획에는 없던 일. 어쩌면 즉흥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우연성을 지닌 채 나는 전시장으로 발을 내디뎠다,

전시 공간에 이르러 처음 마주한 것은 프로방스의 올리브나무였다. 글쎄, 다비드 자맹이라는 작가에 대하여 아무런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던 탓에 내가 느낄 수 있던 건 어떠한 생명력과 태동, 햇살과 활기참 정도였다. 그 외 노이즈가 심한 필름으로 찍은 듯한, 배경과 인물이 뭉개져 버린 흐린 추억들. 그러한 추억들 틈으로 새어 나오는 따뜻한 내음들. 이윽고 프로방스의 풍경들을 지나, 나는 <붉은 피아노가 있는 오케스트라>(L’orchestre au Piano Rouge)와 <피아노 1>(Piano 1), <첼리스트>(Violocelliste)를 만났다.

<피아노 1>(Piano 1)
<붉은 피아노가 있는 오케스트라>(L’orchestre au Piano Rouge)와 <첼리스트>(Violocelliste)

묘했다. 붉은 피아노가 풍경처럼 버티고 있는 오케스트라의 생동력과 리듬과 파동과 선율. 퍼져나가는 음표와도 같이 보이는 물감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첼로 독주. 모든 것이 설득력 있고, 강력했다. 그런데 왜. 연주하는 이 없이, 정지된 붉은 피아노만 덩그러니 놓인 <피아노 1>은 도대체 왜. 박동하고 있는가. 이 그림에서 드러난 떨림은 어디에서 오는가. 나는 까닭에 대하여 찾아야만 했다.

불과 몇 걸음 지나지 않아 <군중의 행렬>(Cavalcade)이라는 제목의 두 작품을 보았다. 잠시 고민을 하였다. <군중의 행렬> 속의 사람은 여러 사람인 것일까, 혹은 하나의 사람일까. 그러니까 혹시 마이브리지의 ‘움직이는 말’(Horse in Motion)의 달리는 말과 기수처럼 약간 다른 시간의 같은 인물일 수는 없을까.

<군중의 행렬>(Cavalcade)

그러니까 일종의 연속촬영과 같아 보였다. 이어지는 댄디 시리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비드 자맹의 그림은 움직이고 있으며, 진동하고 있으며, 시간을 중첩하고 있었다. 예컨대 가만히 책을 읽는 이를 떠올려보자. 아주 가만히 있다 하더라도 약간은 움직인다. 정지된 물체를 가만히 바라보자. 미세한 진동도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물체는 진동한다. 주위의 공기, 먼지, 빛도 진동한다. 우리는 사진과 아주 극도로 정적인 동영상을 왠지 모르게 구분할 수 있지 않나.

하물며 춤을 추는 인간은 어떻겠는가. 움직임은 춤을 통하여 극도로 발산된다. 이렇게 자맹의 그림은 댄디 시리즈로 발전한다. 어쩌면 춤이 아닐지도 모른다. <포스를 풍기는 걸음걸이>(Allure)라는 제목을 보면. 그럼에도 춤일지도 모른다. 격렬하게 진동하고 발산하며 움직이고 있으므로. 그렇기에 그의 걸음걸이는 <환희>(Allégresse),가 되고 <자유>(Libre)가 되고 <살다>(Vivre)가 된다. 자맹은 다른 시각의 이미지를 압착하여 하나의 그림으로 담아내고, 이미지 사이 약간의 균열, 떨림을 통해 진동을 발산한다. 이곳까지 이르자 앞서 보았던 <투우>(Course camaruaise)와 <투우사>(Raseteur et cocardier)가 다시 떠오른다. 매우 유사하지만, 다른 제목, 다른 광경. 아마도 약간의 시간 차이를 두고 전자는 소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면, 후자의 시각時刻에서는 투우사의 움직임이 포착되었을 터이다. 그리하여 나는 자맹이 고흐보다는 모네에 가깝다고 생각하였다. 순간의 생명력과 인상을 거칠게 드러내며 시간의 이격을 둔 채 그려내는 연작. 자맹의 경우에는 하나의 작품에 담아내기도 하지만 말이다. 차이가 있다면 모네의 시간은 빛에 따른다면 자맹의 경우에는 그 스스로의 시선에 변화의 원인이 있다는 것 정도.

<주황색 소파에 앉은 책을 읽는 남자>와 <포스를 풍기는 걸음걸이>
<환희>(Allégresse)
<살다>(Vivre)와 <자유>(Libre)
<투우>(Course camaruaise)와 <투우사>(Raseteur et cocardier)

다시. 그렇다면 피아노의 움직임은 어디로부터 기인하는가. 앞서 슬며시 말하였듯 자맹은 내면을 들여다본다. 그의 움직임은 내면의 움직임에서부터 개화한다. <푸른 내면자화상>(Introportrait en Bleu)의 약동하는 작열감. 아마도 그가 드러내고픈 움직임의 원형(prototype)일 테다. <사랑>(Amour), <사랑하다>(Amier), <러브>(Love), 같은 제목의 또 다른 <사랑>(Amour) 모두 마찬가지일 터이다. 타오르는 사랑과 겹쳐가는 모습, 그리하여 나의 온도가 타인에게 전달되는 일련의 순간들과 생동을 담아낸 것일 테다.

시간성을 가진다는 것은 전진성을 가진다는 것을 뜻한다. 고여있지 않고 흐른다. 단순히 흘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거슬러 역동逆動한다. 자맹은 코로나로 봉쇄 조치가 이루어진 후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긴 곳에서 전에 없던 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자맹은 그 꽃에서 희망과 생명을 발견한다. <화력(華力)>을 보라. 말 그대로 생명력이 태동하고 있지 않나. 자맹에게 움직임이란 이런 것이다. 내면으로부터의 울림을 드러내는 일, 이를 통해 앞으로 힘차게 나아가는 일. 그에게 가장 큰 꿈이란 바로 다음 캔버스라는 말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Mon plus grand reve c'est ma prochaine etoile." _David Jamin)

<사랑>(Amour)과 <사랑하다>(Amier)
<러브>(Love)와 <사랑>(Amour)
<화력(華力)>(Flower Power)

첫 문단에서 말했듯 그는 불행과 절망과 냉소를 그리지 않는다. 그는 자유와 온정, 삶에 대한 사랑을 그리려고 한다. 우리는 자맹이 추구하는 움직임을 보았다. 허나 이는 조금 더 거시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다.

자맹은 남프랑스의 님므(Nimes)에서 태어나 프랑스 북부의 에키앙플라주(Equihenplage)로 이사한 뒤 후에 다시 프랑스 남부의 소도시 위제스(Uzès)로 돌아온다. 자맹은 움직인다. 그가 돌아온 것은 다시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다. 약동하기 위해서이다. 자유, 온정, 사랑. 우리는 그것들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그러니까 움직임의 근원은 나의 내면이라고 하였는데, 나의 내면의 움직임은 어디에서 흘러나와 어디로 흘려보낼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내가 생각하는 자맹의 답은 자연과 추억, 가족이다. <사랑>, <사랑하다>를 떠올린 후 <열정>(La passion)과 <너와 맞닿은 채로>(Tout contre toi)를 바라보자. <사랑>과 <사랑하다>의 진동은 혼자만의 것인가. 아니다. 이 그림들의 생동은 살갗이 겹쳐지고 피부가 맞닿는 열에너지의 전달과정이다. 그렇다면 <열정>과 <너와 맞닿은 채로>는 움직이는가. 그렇다. 편하게 휴식을 취하는 듯 보여도 이들은 격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들의 내면은 움직이고 있고, 그들의 마음은 격동한다. 그렇기에 자맹이 돌아온 따스한 추억 또한 움직임이며, 봄의 울림이다. 자맹과 세린느 사이에서 피어난 아이 역시 새로운 세대에 대한 애정과 기대와 희망이기에 움직임이다. 자맹의 말마따나 우리는 불행, 절망, 우울, 냉소, 부정의 시대에 살고 있다. 허나 내가 움직이고, 우리가 움직이고, 새로운 생명들이 움직여나간다면 우리는 그곳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가족>(La Famille), <노랑풍선>(Le ballon jaune), <둥지>(Le nid)
<열정>(La passion)과 <너와 맞닿은 채로>(Tout contre toi)
<푸른 내면자화상>(Introportrait en Bl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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