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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텔라 Aug 15. 2023

겨울을 좋아합니다

2021년 함박눈 내리는 어느 겨울날

창밖은 설국(雪國)입니다. 기분이 좋습니다. 

또 마음이 설렙니다. 

오후 늦게 내리기 시작한 눈이 밤이 되도록 나립니다. 

아이들이 나가자고 성화입니다. 



아 참! 마침 분리수거 날인 것을 깜박 잊고 있었습니다. 

꼬박 일주일 동안 집안 곳곳에 모인 재활용품 더미들. 

밤 9시를 훌쩍 넘긴 시간에 두 아이와 집을 나섰습니다. 

밖은 꽁꽁 얼었을 테니, 밖에서 분류할 일이 없도록 꼼꼼하게 나누어 정리합니다. 

먹거리와 생활용품 배달량이 늘어 종이상자와 플라스틱류가 많이 늘었습니다.

양이 꽤 많아 두 아이도 양손 가득합니다. 

아파트 동 현관문을 나서자마자 온통 새하얀 눈밭입니다. 

우와! 환호성이 터져 나옵니다. 



굵은 눈발이 날려 머리가 젖지 않도록 모자를 당겨 씁니다. 

서둘러 옆 동 길모퉁이를 돌아 아파트 뒤편 공터로 갑니다.

재빨리 재활용품을 칸칸이 던져두고 오던 길로 돌아섭니다. 

사뿐히 내려앉는 눈송이를 바라보다 소복한 눈길에 발자국을 새깁니다.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아이들도 나도 내내 미소가 떠나질 않습니다.

새 눈이라 밟기에도 부드럽고 폭폭 느낌도 끝내 줍니다. 

웃고 떠들며 눈을 뭉쳐 던지고, 굴려서 눈사람도 만들고, 

급기야 막내는 드러누워 천사 만들기에 도전합니다. 

누나가 장난기가 발동하여 눈가루를 한가득 뿌려 줍니다. 

집 근처에서 이렇게 많은 눈을 본 것은 정말 오랜만입니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마음에 눈이 가득한 날입니다.     

 


겨울을 좋아합니다. 수줍음이 많아서요. 그래서 겨울을 좋아합니다.

꽁꽁 감춥니다. 두꺼운 옷으로 나를 감싸고 있으면 편안한 느낌이 듭니다. 

실내에서도 웬만하면 겉옷을 입은 채로 있습니다. 그러면 왠지 더 안전한 느낌이 듭니다.

몸을 드러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누가 신경이나 쓰겠냐만, 그런 것 같습니다.

뱃살을 쏙 빼놓으면 달라질까요? 



아하!

누가 신경을 쓰나 보았더니 바로 나입니다.

내가 나를 늘 관찰하고 바라보고 있었네요. 이제야 알았습니다.

나를 집요하게 따라다니고 감시하는 내가 있었다는 것을요.     

헐렁한 코트나 길고 두꺼운 점퍼를 입으면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습니다.

뱃살도 감추고 왠지 내 마음도 감추어 주는 것 같습니다.

몸의 실루엣이 드러나는 옷은 잘 입지 않습니다.

몸도 불편하고 마음마저 불편해서요.



겨울은 대화를 나누기에 참 좋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좋은 사람과 있다면 

대화는 언제라도 좋겠지만, 

유독 바람 차고 추운 겨울날,

분위기 좋은 곳 테이블에 모여 앉아 나누는 이야기는

더욱더 정겹고 따뜻한 것 같습니다. 

좋은 장소에서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특별한 시간을 가져도 좋지만

요즘은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비대면 화상으로 사람을 만납니다. 

상당히 매력적인 일상의 도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일부러 멀리 가지 않아도, 오전 10시 혹은 저녁 식사 후 8시, 9시도 좋습니다.

각자 집에서 편한 곳에 앉아 이야기를 나눕니다.

모임의 주제는 다양합니다.

주제에 따라 나누는 이야기도 풍성합니다.

때론 진지하게 책에 관해 발제 토론을 하고,

때론 좋아하는 맥주를 마시며 가벼운 일상의 이야기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합니다.

코로나가 일상에 위기와 도전, 어려운 과제를 던져주었지만,

주제가 있는 일상의 모임에 쉽게 참여할 수 있어서 좋은 점도 있습니다.   

  


온라인 밤마실에 가끔 참석합니다. 정해진 주제는 없습니다.

읽은 책 이야기, 사는 이야기,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합니다.

힘들었던 일도, 즐거운 일도, 하고 싶은 만큼 나눌 수 있습니다.

교사 모임이라 공감대가 형성이 잘 됩니다. 

이야기를 나누며 위로받는 ‘도토리시간’,

상처받고 힘들어 한없이 작아지고 작아지는 때,

엄마 자궁 속 태아처럼 도토리 안에 들어가 쉬며 치유 받는 시간입니다.

온전한 휴식을 한 뒤 새롭게 태어나면 또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 그간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꽃이 활짝 핍니다.

사람의 향기가 묻어나는 행복한 시간입니다.     



겨우내 베란다에 못 본 척 버려둔 딸기 화분,

지나다 보니 활짝 하얀 꽃이 달렸습니다. 

눈 내리는 겨울, 꽃을 피워낸 딸기가 대견합니다.

죽은 줄만 알았는데, 꽁꽁 생명력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신기해서 하얀 딸기꽃을 들여다보는데,

또 마음이 설렙니다. 

꽁꽁 깊숙이 봄을 숨겨온 겨울은 나와 많이 닮았습니다. 

한겨울 딸기꽃처럼, 나도 내 안에 봄을 숨겨두고 있나 봅니다.

어서 부끄럼을 이겨내고 활짝 꽃을 피워야겠습니다.

부지런히 겨울 햇살 담고 모아서요.




                                                                                           [도토리시간] 그림책 작가 : 이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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