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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씨 Feb 16. 2022

같은 문장, 다른 해석



                                 같은 말 다른 해석


학원에서 근무할 때였다. 중간고사 시험을 대비하고 있었다. 예상 문제를 풀고, 각자 채점을 하게 했다. 그리고 마지막 문제의 오답을 정리한 후, "틀린 거 10번씩 쓰자"라는 말 한마디를 더했다.  




근데 A가 갑자기 "선생님은 나만 미워해. 엉엉"하며 그야말로 폭풍 오열을 터뜨렸다. 당연히 모두의 집중이 A에게 모였다.  무슨 영문인 지 파악이 안 된 나는 A에게 다가가기로 했다. 책상 위에 시험지가 보였다. 보슬비가 아니라 거침없는 소나기였다. 그제야 상황이 파악이 됐다. 10번씩 쓰기엔 틀린 게 너무나도 많았던 것.




교실은  예기치 못한 이벤트로 산만해졌다. 나는 그 친구에게 양심껏 할 수 있는 만큼만 해 오라고 정리를 했다. 그러자 수업 종이 울렸다. 다들 교실을 떠났다.  그런데 B가 다가왔다. 그리고는 "에휴, 계속 같은 걸 틀려요. 10번 쓰면서 진짜 시험에선 실수 안 할게요."라며 굳이 안 건네어도 되는 말을 건넸다.




같은 말을 해석해내는 능력은 한 교실에 앉아 있는 동급생 이어도 이렇게 온도차가 났다.




                                 B가 더 예뻤던 이



내가 기억하는 B는 전교권의 성적을 유지하고 있는 모범생이었고, 외모도 호감형이었고 성격은 더 호감형이었다. 간식을 사 먹으면 늘 나에게도 나눠졌고, 쉬는 시간에 찾아와서 학교 얘기도 조근 조근 해 주고, 궁금한 걸 물어보기도 했다. 물론 먹을 걸 사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학원 강사로 그 아이를 편애한다고 수행 평가 점수를 높이 준다는 식의 특혜를 줄 수는 없었지만 확실히 정이 많이 갔다. 한 마디로 공부도 잘하는데, 아니  공부를 잘하는 건 호감의 이유로 부정확한 설명이다. 상황에 따른 문맥을 제대로 읽고 행동하니까, 칭찬받고, 그 칭찬 속에서 더 사랑받는 아이로 자라는 선순환의 모범 사례 같은 아이였다.     




비교는 나쁜 거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비교를 적어보면 B의 행동이 더 인상적이게 된 건 이런 학생들 덕분이다. 나이가 어려서 무례해도 용서받을 수 있는 아이들이라고 적어보겠다. 사리 분별 능력을 아직 키워내지 못한 아이들이니까. 교육학을 부전공했고, TESOL 자격증도 있지만 학교 선생님이 아니기 때문에, 학원 강사를 대하는 시선은 당연히 학교 선생님과 동등할 수 없었다.  뭐, 이건 팩트니까 기분 상할 일이 아니다. 근데 일부가 늘 문제다.  "학교 선생님도 아니면서, 쳇"이라고 면전에 대놓고 부적절 말을 내뱉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들은 패턴이 있는데, 대개 무리를 지어 이런 말을 해댔다. 본인도 잘한 행동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데다 혼자 소리치면 정당성을 더 부여받지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셋이 모이면 없던 호랑이도 만들 수 있다는 거, 논리가 빈약할 때 쓸 수 있는 유일한 패이기 때문일 거다.  그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테스트를 한다. 모더니즘이 뭐예요? 뭐 이런 중요하지 않지만 교과서에 나오는 것들을 물어본다. 의도가 명확하다. 걸리기만 해라, 뭐 이런 심보다.




 그렇게 극명히 대비되는 행동은 결과적으로 B에게 더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맞닥드리는 건 이런 질문이었다. 아니, 불만이었다. 선생님은 공부 잘하는 학생만 편애해. 그럼  "사실은 말이지."라고 길게 설명을 해 주고 싶은 욕구가 생기곤 했는데... 과연 이 아이들이 제대로 이해해낼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의욕은 사그라들었고 대신 "나는 나에게 맛있는 걸 사주는 애를 예뻐해. 공부 잘하는 아이 말고."라고 농담을 던졌는데.... 놀라운 건 진짜 다음날 평상시보다 책상 위에 간식이 많이 쌓였다는 거... 아무리 센 척해도 세상에 때 묻지 않은 청소년들은 귀여운 구석이 꽤 많다.  

   



그때 하고 싶었던 말을 적어봤다. 왜냐면 자기 밑바탕 드러나는 줄 모르고 부끄러운 말을 서슴없이 하는 이들에게 말해주고 싶어서다. 물론 그들이 이 글을 읽고 바뀔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장착한 사람들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적기로 했다.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다. 아니, 그냥 하고 싶었던 얘기기 때문이다.




어느 미대 수업에서는 학생들에게 100개의 시안을 한 번에 제출하라는 과제를 내준다고 한다. 성인이 되었을 A가 떠오른다. 그때와 달리 과제의 숨은 의미를 파악해내는 어른으로 성장했길 바란다. 적어도 버겁다는 이유만으로 그 자리에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지 않길... 그 과제가 버겁게 느껴진 상황 설명을 교수님과 면담이라는 방식으로 풀어나가는 선택권도 고려할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했길 바란다. 100개 시안이라는 과제를 해내기 곤란한 사정도 분명 있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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