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에 대한 책을 읽다 "hollow face illusion"이라는 현상을 알게 되었다. 직역하자면 "오목한 얼굴의 착시 현상" 정도일 텐데, 몇몇 동물들이 진화의 과정에서 사람의 얼굴을 천적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아 자신의 무늬를 사람 얼굴 모양으로 진화시켰다는 것이 실로 대단한 "착각"이라는 내용이었다. 사람의 무늬는 사람이 보기에 사람의 얼굴이지, 해당 동물이 그 무늬로 진화한 것은 그저 우연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 오목한 얼굴 착시 현상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볼록한 가면의 뒷면, 즉 오목한 면을 바라보고 가면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가면 속 얼굴은 왼쪽으로 회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왼쪽으로 가면을 돌리면 얼굴은 오른쪽으로 회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보이는 것은 단순한 착시 현상일 뿐, 실제 진행 방향은 그렇지 않다.
가면의 오목한 면을 바라보면, 가면이 회전하는 방향과 얼굴이 반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휴직이 4개월 차에 접어들었을 무렵 인사팀에서 연락이 왔었다.
"팀장님, 혹시 내년 초에 복귀하실 계획이 있으실까요? 신규 임원 분들도 오셨고 내년 초 조직개편을 계획 중인데, 복귀하신다면 인력 배분을 고려해야 해서요."
마침 그때 즈음이 아이의 베일리 검사 결과에서 나온 지연된 항목들에 대해서 교육을 해줄 각종 발달센터를 알아보고 있던 시점이기도 했었고, 아직까지는 쉬는 것 자체가 너무도 좋았던 시점이라 원래 계획대로 내년 여름에 복귀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내가 복귀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봄에 조직 개편이 있을 테니 아마도 내년 여름에 복귀하면, 팀장이 아닐 가능성은 높아졌을 것 같다.
내가 휴직을 하던 시점에 퇴사를 한 옆팀 팀장님이 있었는데 나와 같이 몇 개월을 쉬다가, 아마 저 전화가 왔던 때 즈음에 모 금융 기업에서 신규로 설립한 광고회사에 임원으로 취업을 하게 되었다. 술자리를 자주 같이하던 무리들 사이에서 드디어 우리 사이에서도 C레벨 임원이 나왔다고 기뻐했었다. 아마도 그 형님(이제는 호형호제하는 사이이다)의 눈에는 휴직 중인 내가 걱정이 되었나 보다.
"너도 너무 오래 쉬지 말고 회사로 돌아가던지, 아니면 이 참에 옮기는 걸 생각해봐."
육아 휴직을 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가장 많이 해준 얘기는 "팀장이 그래도 괜찮겠어?"라는 질문과 걱정이 섞인 말이었다. 대기업 내에서 휴직은 반드시 누군가로 대체된다. 특히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 대체재가 많다. 네가 없는 사이 누가 그 자리를 꿰차면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걱정이 그 본질이었으리라.
틀린 얘기는 아닐 것이다. 적어도 회사를 다니는 사람의 입장에서 나의 커리어는 현재 일시 중지 상태이니까. 우둔한 월급쟁이였던 탓에 급여 외에 돈 나올 구멍은 없었던 터라 현재는 나의 대출을 까먹고 있는 중이고, 그렇다고 사업을 준비하는 것도 아니니 난 경제 활동의 생산주체로는 멈춰있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은 흘러가고 있다. 나는 매일 아들과 함께 아침을 맞이하고 있으며,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있다. 조금 느린 아들의 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발달센터나 언어센터도 함께 하고 있다. 무엇보다 아이가 무슨 일이 생기면 "아빠"를 먼저 찾는 이 감정적 유대관계를 만들었다.
아들과 공을 차고, 책을 읽고, 말 연습을 시키고, 아이를 목마 태우고 안고 돌아다니고, 종이비행기를 접고, 로켓을 만들고, 노래를 부르고, 터널 귀신이 되어 아이를 잡아먹기도 하고, 아이에게 계란 프라이를 만들어 주기도, 때로는 롯데리아의 감자튀김을 먹이기도 하고, 함께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기도 하고, 함께 병원도 가고, 기저귀도 갈고, 뽀로로도 보여준다.
그것이 밖에서 보기에 멈춰있지만 매일매일 쉴 틈 없이 행복하게 달려가고 있는 현재의 내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