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로버트 바라테온 왕의 단 한명의 충신, 북부의 영주 네드(에다드) 스타크에게는 [얼음]이라는 이름의 명검이 있었다. 새 왕이 될 조프리 왕자의 출생의 비밀을 캐던 스타크는 왕비의 친정 라니스터 가문의 덫에 걸리고 사이코패스 조프리의 변덕에 자신의 검 [얼음]으로 목이 잘린다. 네드의 아들 롭 스타크의 반란마저 간계로 분쇄한 라니스터 가문의 수장 타이윈 라니스터는 느긋하게 웬만한 검 두배로 무거운 [얼음]을 녹여 2개의 검을 만든다.
에다드 스타크의 명검 [얼음]을 녹여 검 두개를 만들고 있다.
두개 중 한개는 조프리에게, 다른 한개는 아들 제이미 라니스터에게 주어졌다. 제이미는 그 검을 자신이 목숨을 빚지고 목숨을 살리기도 했던 여기사, 타스의 브리엔느에게선물하는데..
다 좋은데, 칼은 저렇게 녹여 부어 만들면 안된다. 이 검의 재질은 발리리아 강철, 원작 <얼음과 불의 노래> 세계관 작중 시점에서 300년 전 실전(失傳)된 기술로 제조된 강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강도 주강(鑄鋼)이라 하여 주철처럼 형틀(mould)에 녹여 붓기도 하지만 주철만큼 유동성이 좋지 않아 복잡하거나 얇은 형상은 제작하기 힘들고 기포와 균열(crack) 같은 결함도 주철보다 심하다. 도검류처럼 얇고 가늘고 상당한 강도가 요구되는 제품의 제작법으로는 부적합하다. 게다가 밀폐된 주형도 아닌, 위 화면캡쳐로 보는것 같은 바닥주형(open mould)으로 얇은 물건을 주조한다면 산화(酸化)로 아주 못쓰게 될 것이다.
칼은 두들겨서 만들어야 한다. 이녀석처럼.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의 한장면. 주인공 발리앙은 대장장이였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의 주인공 발리앙(올랜도 블룸 분)의 직업은 대장장이였다. 평범한 대장장이는 아니고 예루살렘 왕국의 영주 고드프리(리암 니슨 분)의 사생아다. 물론 영화상의 각색이다. 예루살렘 농성전의 실존 인물 이벨린의 발리앙(Balian d'Ibelin)은 대장장이 따위 할 이유 없었던 초고위 귀족의 적통이었다.
중세 유럽에서 대장장이의 사회적 지위는 만화나 영화에서 보는 것만큼 낮지 않았다. 기사에게는 무기를, 농민에게는 농기구를 공급하는 아주 중요한 직분이었다. 대장장이는 또 대개 금속 세공업자도 겸했기 때문에 귀족들이 필요로 하는 각종 사치품까지 제작 공급하여 부를 쌓기도 했다. 카롤루스 대제, 프랑스식으로 샤를마뉴(Charlemagne, 732~814)는 대장장이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고 신분을 법적으로 보장했는데, 아마 대장장이 조합을 장악하여 영주들을 경제적으로 통제하려는 의도였을 것 같다. 늘상 전쟁을 일으켜 휘하 영주와 귀족들의 충성 맹세를 받아내던 황제였기에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기사와 영주들은 전투에 나가면서 대장장이를 고용하여 무기와 사슬 갑옷을 갖추어야 했다.
대장장이도 석공이나 다른 수공업처럼 조합(guild)을 형성하였고 대장간업(業)은 점차 지역사회를 벗어나 도시간 무역의 중심 아이템이 되어갔다. 이렇게 대장간업으로 번영한 최초의 도시중 하나가 현재의 독일 바이에른 주 딩켈스뷜(Dinkelsbhhl)이다. 이곳에서는 14세기에 대장장이가 시의회 의원까지 되었다.
강철을 불에 달구면 무르게 되어 쉽게 변형을 가할 수 있다. 온도는 900~1200℃ 사이에서 두드리는데, 대장장이들은 달구어진 색깔을 보고 안다. 이렇게 쇠를 두드려서 형상을 만드는 것을 단조(鍛造; forging)라 한다.지금도 대장간이 있어 식도류 같은걸 단조하여 비싼 값에 거래하지만 옛날보다는 훨씬 덜 두드릴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는 소재가 검증되어 있고(주로 차량 겹판 스프링을 쓴다) 과거에는 소재 내에 불순물이 많아 이를 두드려서 물성을 맞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불에 달구어 두드리면 인(P), 황(S), 마그네슘(Mg) 등의 불순물이 석출되어 산화한다. 좋은 품질의 강을 만드려면 하루종일 두드려야 했는데 그 와중에 강의 성질에 절대적 영향을 주는 탄소까지 빠져나와 경도와 강도가 저하되기도 했다. 그래서두드려서 변형되는 정도를 감으로 판단하여 틈틈히 숯이나 석탄불에 묻어 탄소 함량을 높이는 침탄(carburizing)도 시켜줬다.
옛날 대장장이들이 남긴 유물 중에 후대인들이 감탄한 명품도 종종 있다. 그 중 최고의 명품으로 인정 받는 것은 다마스커스 강(Damascus steel)으로 만든 검, 다마스커스 검이다. 아마 발리앙이 대적한 살라흐 앗 딘 유수프, 일명 살라딘의 군대도 그 검을 썼을 것이다.
다마스커스 검의 표면 무늬
다마스커스, 혹은 다마스크 검은 표면의 독특한 물결 무늬로 유명하다. 이 검의 재료 다마스커스 강의 제조법은 18세기경실전(失傳)되었고 현재 이 무늬 비슷하게 만들어 내는 건 강판을 여러장 겹쳐 열간에서 두드린 짝퉁이다. 원래의 다마스커스 강은 현대의 분석 결과 바나듐(V)과 몰리브데넘(Mo)이 함유된 철광석으로 뽑은 선철을 탄소 1.5% 내외까지 지금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정련한 재질이라 한다. 정련 과정에서 이들 원소가 석출 산화되지 않고 편석이 되어 무늬가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이 검은 무게 대비 강도(strength)가 탁월하고 경도 또한 높아 좀체로 닳지 않았다. 유럽의 십자군이 강도를 내기 위해 두껍게 제작한 검으로 쩔쩔 맬 때 사라센군은 다마스커스 검을 가볍게 휘둘러 십자군의 갑옷을 썩썩 갈랐다.
<얼음과 불의 노래>의 발리리아 강철검은 이 다마스커스 검에서 모티브를 딴 게 아닌가 생각한다. 검을 만든 발리리아 왕국은 동방의 에소스 대륙에 있었던 나라다. 판타지 문학은 묘하게 현실을 패러디하는데, <얼불노> 웨스테로스 대륙의 7왕국도 현실의 중세 유럽 나라들의 이미지를 차용했다. 북부는 게르만, 강철군도는 바이킹, 티렐 가문의 리치는 프랑스, 도른은 스페인 등등이다. J. R. R. 톨킨의 고전 <반지의 제왕> 중간계 지형은 브리튼 섬을 육지화한 유럽 지도와 흡사한데, 사우론의 근거지 모르도르의 위치는 유럽인들을 줄기차게 괴롭힌 튀르키예 위치와 같다.
다마스커스 검에 비할 건 아니지만 동양 3국에서도 꽤나 이름을 떨친 칼이 있었다.
<킬 빌> 최고의 싸움꾼 베아트리스 키도
조선왕조실록에도 일본도에 대한 기사가 몇개 나오는데 하나같이 이 칼의 우수성에 대한 것이다. 명품 대접을 받으니 투자 목적으로 사 모으는 사람들도 있었다. 인조 24년, 아들 소현세자와 며느리 강빈을 저세상으로 보낸 임금이 강빈의 개인 재산을 처분하는데,
명하여 강씨(姜氏)의 개인 소장인 은(銀) 1만 6백 50냥(兩)·황금 1백 60냥, 왜검(倭劍) 19자루를 호조에 귀속시켜 별도로 창고 하나에 비치해 두게 하고 소현의 여러 자녀가 혼인할 때 혼수(婚需)로 쓰도록 하였다. (인조실록 47권, 인조 24년 5월 2일 정미 1번째 기사)
무사도 아닌 여인이 왜검, 즉 일본도를 19자루나 소장하고 있었다.볼모로 잡혀간 청나라에서 사업을 벌여 그 수익금으로 조선인 노예를 해방시키기도 했던 사람이라 개인적인 투자도 많이 했겠지만 패물이 아닌 일본도라니, 파란만장한 생을 비극으로 마감한 여걸의 이미지와 잘 맞기는 하다.
일본도의 제작법은 현재까지 잘 알려져 있다. 두장의 강판을 겹치는데, 강도는 떨어지나 신장성이 좋은 저탄소~중탄소강을 U자형으로 접고 그 사이에 강도가 큰 I자형 고탄소강을 삽입한 뒤 열간에서 단조하는 접쇠 방식이다. 일본도의 칼날 길이방향 무늬는 성형 후 연마 전 열처리를 하는 방법에서 나온다. 칼등 쪽을 진흙으로 마스킹한 후 칼 전체를 가열하여 물에 담그면 칼날과 칼등의 식는 속도가 차이가 나서 칼날은 경도를, 칼등은 인성(忍性; toughness)을 갖게 되며 냉각 속도의 차이가 칼날의색깔 차이를 만든다.진흙 붙이는 방법에 따라 여러모양의 패턴을 연출할 수 있다.
일본도 칼날의 무늬. 진흙 마스킹에 의한 것이다.
일본도 최고의 명품으로 소수의 수집가들이 과시용으로 거래했던 마사무네가 있다. 1300년 전후 소슈 마사무네(相州正宗)라는 장인이 만든 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마사무네 덕후였다. 워낙 고가의 레어템이라 짝퉁도 많고 그래서 인증서가 달렸고 그 인증서까지 고가에 사고 팔렸다. 소슈 마사무네는 자식에게도 검의 제작법을 알려주고 싶어하지 않았는데, 어느날 열처리를 하다 아들의 손이 물에 잠깐 잠기자 물의 온도를 알게 된 그 손을 잘라버렸다고 한다. 매우 일본풍 전설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마케팅 목적의 언플일 가능성이 더 크다.
손재주 좋은 민족으로 소문난 조선의 대장장이는 어땠을까? 특수기능 보유자로서 특별한 취급을 받은 것은 조선 대장장이도 예외는 아니다. 성종 14년(1483)에 투항한 여진족을 도승지 이세좌(李世佐)가 심문하는데 무리 중에 대장장이가 있는지를 굳이 확인할 정도다. 다만 그 특별한 취급이 특별한 대접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지배층의 찌질함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例)로서, 착취의 대상이기도 하고 무기를 만드는 기술 때문에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수많은 역모 사건에 대장장이가 얽혀 들어갔고 대장간에 모여 역적모의를 했다는 고변도 있다. 감시의 눈초리가 사방에서 번득이니 부엌칼 말고 다른 도검은 꿈도 꾸지 못했다. 명종 12년(1557)에는 단양군수 황준량이 민가 착취를 고발하는 10개항의 상소를 올리는데,
김홍도, 대장간
...넷째는 야장(冶匠)에 대한 폐단입니다.
병오년에 처음으로 2명을 정했는데 모두 걸인(乞人)들로 그 액수(額數)를 채워 놓고 후일의 폐단을 생각지 않은 것이었으니, 액수는 그대로 있고 사람은 없으므로 아울러 민간에게 책임지우고 있습니다. (중략)살을 저며내고 피를 말리는 참상은 차마 말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삼가 야장의 폐단을 아주 제거하고 아울러 2년 동안 궐한 가포도 면제해 주신다면 남은 백성이 혹 여기에서 조금은 소생하게 될 것입니다. (명종실록 22권, 명종 12년 5월 7일 기미 2번째 기사)
일은 힘들고 대접은 무엇같아 대장장이들이 도망가버리고 머릿수만 채워놓으니 진상품으로 철제품을 바쳐야 할 지역민들이 아주 죽을 맛이라는 뜻이다.
금속을 변형시킨 후 변형을 일으킨 외력을 제거했을 때 원래 형상으로 돌아가려는 성질이 탄성(彈性; elasticity)이다. 완전히 되돌아갈 정도로 작은 변형의 한계를 탄성한계(elastic limit)라 하며, 탄성한계보다 더 크게 변형을 주면 돌아가지 않고 변형된 그대로 있다. 이를 금속의 소성(塑性; plasticity)이라 한다. 모든 금속은 탄성과 소성을 다 같이 가지고 있다. 소성변형을 시켜도 약간은 원상태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은 탄성이 사라지지 않았기 떄문이다. 금속을 가열하여 금속 결정 입자가 형성되기 전으로 초기화하면 탄성이 없어지는데 이 때는 적은 힘으로도 큰 변형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탄성한계보다 아주 큰 힘으로 변형을 가하면 항복점(yield point)라 하는, 힘을 더 증가시키지 않아도 변형이 되는 지점을 만나고 이 지점 이상에서는 열을 가하지 않고도 영구변형을 얻을 수 있다.
이렇듯 금속의 소성을 이용한 가공법을 소성가공(塑性加工)이라 한다. 열을 가하여 가공하면 열간가공, 상온에서 만들면 냉간가공이다. 주조, 절삭, 용접과 더불어 대표적인 금속 가공법이고 가장 많이 사용되며 사실상 거의 모든 금속 재료가 소성가공으로 그 형태를 갖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