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관리 소설입니다
날씨가 조금씩 추워지면서 은수는 마음이 조금씩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또 왔구나.'
매년 그랬듯이 계절성 우울이 은수를 방문한 것이다. 벌써 몇 년째 이 일을 겪고 있는 은수는 더이상 놀라거나 절망하지는 않았다. 물론 귀찮고 힘이 빠지긴 했지만. 그녀는 이럴 때를 대비해 자기만의 매뉴얼을 만들어놓았다. 우선 의사 선생님에게 우울이 왔음을 알리고 항우울제의 용량을 증량했다. 힘이 많이 드는 일은 되도록 뒤로 미루고 하루 이틀쯤은 푹 쉬었다.
그다음부터는 나가기 힘들어도 하루 한 번은 외출이나 산책을 했다. 혼자서 일하는 프리랜서인 은수에게 이런 루틴은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움직이기 힘들어도 작은 일이라도 조금씩 해서 활동성을 늘리는 게 좋은 방법이었다. 하고 나면 자신을 듬뿍 칭찬해주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푹 쉬었다. 이렇게 매일매일을 조금씩 재활하며 지내다 보면 안개가 서서히 걷히듯 우울이 나아지곤 했다.
드드득드드득
전화 오는 진동 소리가 들렸다. 별로 반가운 전화는 아니었다. 엄마였다. 엄마와 은수는 그리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전에는 엄마와 전화를 하면 뾰족한 말들에 울면서 전화를 끊은 적도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엄마와의 기나긴 전쟁에 마침표를 찍은 일이 있었다.
더 엄마가 자기를 함부로 대하는 걸 참을 수 없었던 은수는 엄마에게 어릴 때부터 하고 싶었던 말들을 편지로 길게 길게 써봤다. 그렇게 했더니 무의식적으로 어린아이처럼 두려워했던 엄마에 대한 마음이 어른의 마음으로 정리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다음부터 조금씩 엄마를 무서워하지 않고 할 말을 하는 연습을 했더니 요즘은 예전처럼 휘둘리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은수는 오늘도 좀 두렵지만 담담한 마음으로 전화기를 들어서 말했다.
“엄마야?”
오늘은 원고 마감인데 썼던 원고가 마음에 안 들어서 은수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전에는 이럴 때 그 불안함에 휩싸여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심리상담 선생님에게 배운 기술을 쓰면서 벗어나곤 한다. 그것은 일어난 사건에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의 이름을 붙여주고, 어떻게 하고 싶은지 잘 생각해보는 것이다. 은수는 지금 드는 감정에 '불안함'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원고를 다시 고쳐쓰기'를 선택해서 불안함에서 벗어나 다시 행동하기 시작했다.
가끔 살아가는 건 끝없는 고통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은수도 마찬가지로 느낀다. 그렇지만 가끔은 즐거운 일들도 일어난다. 예를 들어 맛있는 커피와 케이크를 먹는 일 같은 것이다. 그리웠던 친구에게서 먼저 연락이 오기도 한다. 이런 좋은 일들을 잊지 않고 잘 간직해서 기쁨의 구슬로 만들어놓으면 좋다.
은수는 원래 완벽주의가 심해서 무슨 일을 하든 굉장히 힘들어했다. 미루기 일쑤였고 마감을 잘 어겼다. 어떤 일을 해도 만족하기가 힘들었다. 그때 친구가 해 준 말이 은수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은수야, 완벽하게 하려고 하지 말고 그럭저럭 괜찮게 해봐. 그리고 너무 잘 하려고 하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고 생각해봐.”
이 말이 은수에게는 굉장히 놀라운 말이었다. 항상 최선을 다해서 완벽하게 하려고 했지 그럭저럭 괜찮게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봐도 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 말을 듣고 무슨 일을 할 때마다 계속 생각하니까 완벽주의가 조금씩 줄어들어서 사는 게 쾌적해졌다.
은수는 어릴 때부터 고생을 많이 해서 항상 죽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책에서 ‘사람이 죽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살고 싶지 않은 것’이라는 메시지를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자기 자신도 역시 지금처럼 살고 싶은 게 아니지, 죽고 싶은 것은 아니란 것은 발견한 것이다.
그 뒤부터 생활 상황이 나아지게 하려고 일단 여기저기 지원을 알아보면서 노력을 했다. 그리고 계속 라디오처럼 나오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주의 깊게 듣지 않고 흘려보내려 노력했다. 혹은 주파수를 바꾸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이런 노력을 계속하자 죽고 싶다는 생각이 덜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정말 조금도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순간이 찾아왔다.
‘평생을 자살 사고를 BGM으로 살아왔는데 이런 날이 찾아오는구나.’
은수는 조용히 행복한 눈물을 흘렸다.
원래 은수는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깊은 우울증에 빠져서 살고 있었다. 이렇게는 계속 살고 싶지 않는다는 생각에 아르바이트하면서 심리상담비용을 벌어서 상담하고 정신과에 다니기를 몇 년이나 했다. 그런 사투 끝에 드디어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삶이 나아지자 은수는 자신의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며 함께 나아지고 싶어졌다. 그 일이 바로 글쓰는 일이며 앞으로도 계속 이런 일을 할 생각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자신에게도 힘과 기쁨이 되는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