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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원 Jan 03. 2019

나의 사랑하는 생활

퇴근 후 독서가 주는 행복이란

 작가 피천득은 시 <나의 사랑하는 생활>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나열한다. 오래된 가구의 마호가니 빛이라든지, 아가의 머리칼 만지기라든지, 우리나라의 가을 하늘이라든지, 또는 잔디 밟기와 같은 주로 소박한 것들이다. 나는 고등학생 때 이 시를 처음 접했던 것 같다. 그때의 감상이 잘 기억나진 않지만, 요새 소확행이라는 말이 유행해서인지 다시 보니 더 공감이 되고 반가웠다.

 나도 언젠가 휴대폰 메모장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나열해 본 적이 있다. 카페에서 맛있는 커피를 시켜 놓고 오롯이 혼자 보내는 시간-말 없이도 괜찮은 사람이라면 옆에 누가 있어도 좋겠다-, 해지기 전 핑크빛이 감도는 하늘, 밤길을 마중나온 아빠의 투박한 손을 잡고 걷는 것, 여행 전날 짐 싸는 시간, 공항의 공기, 퇴근 후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침대에 기대어 읽는 책... 그중에서도 오늘은 독서가 주는 행복을 돌아보려고 한다.

 패션 회사에 입사하고 일한지 2년 째, 트렌드가 끊임없이 바뀌듯 나의 업무도 비수기가 따로 없이 기본적으로는 매일 정신이 없다. 그래서 회사에 있는 동안 멍을 때릴 시간은 당연히 없고, 출근부터 퇴근까지 허덕이며 업무를 떨어내기 바쁘다. 적응이 덜 됐을 적에는 회사에서 나오면 승모근이 빳빳하게 뭉치고 온 몸에 긴장이 서렸다 풀려 욱신거리기까지 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귀가하면 자취방에 TV는 없고, 대신 블루투스 스피커를 바로 트는 것으로 적막을 깬다. 샤워하는 동안은 들리지도 않는데도 꾸준히 틀어놓는 편이다. 그렇게 샤워를 끝내고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탈탈 털어낸다. 대충 잠옷을 입고 무드등 하나만 켠 채, 불을 끄고 침대에 앉아 책을 편다. 이제부터 나와 책만의 시간이다.

 책은 주로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는다. 여태까지 침대에서 읽은 책이 선반에 열맞춰 자리한 모습들도 뿌듯하다. 하루를 일로 보내고 남은 얼마 안되는 소중한, 나의 여가시간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책 한 권을 거의 다 읽을 때도 있고, 단편 한 편을 읽고 멈출 때도 있고, 한 두 장 읽고 말 때도 있다. 재밌을 것 같아서 시작했다가 덮어놓고 다시 안 열어보는 책도 있다. 그런 애들한테는 읽어주지 못했다는 약간의 죄책감은 있지만 괜찮다. 재밌는 책만 읽기도 시간이 모자라니까.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중고서점에서 건진(?) 후 집까지 가는 길이 설렜던 적도 많다. 빨리 이 행복한 시간을 만끽하고 싶어서.

 올해 내 나이는 스물 여섯, 2018년을 계획하며 내 나이만큼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20권을 못채웠다. 하지만 숫자보다 그 20권 가까이 읽은 책들이 나의 퇴근과 출근 사이, 자칫 생계를 위한 잠으로만 채워질 수도 있었던 간극을 생생하게 깨워준 것에 고마운 한 해다. 내년에는 독서 편식을 조금 줄이고 어렵더라도 배우고 싶은 분야를 읽고 싶은 생각이 있다. 지켜지지 않더라도 상관은 없다. 나는 어떤 책을 분명 읽을 것이고, 마음이 저릿한 문장들을 만날 것이고, 그게 또 나를 살아가게 할테니까.  요즘 침대에서는 최은영 작가의 <내게 무해한 사람>을 읽고 있다. 엊그제 두번째 단편을 읽다가 울어버려서 다음날 부을 눈이 걱정되어 멈췄다. 다시 다음 편을 읽으러, 나의 사랑하는 생활을 만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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