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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주 Nov 20. 2022

꼴등 로봇 달리기

물리학과 만년꼴찌, 완주를 향하여


학기 도중 인턴 과정을 마치고 막 수업에 복귀한 날이었다. 날은 원래 강의실이 아닌, 물리학과 연구실이 몰려있는 과학관 10층으로 오라는 락을 받았다. 로봇 자동차 시범 경주를 할 예정이라고 했다. 벌써 경주라니. 한 달 전만 해도 어떤 모양의 로봇차를 만들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고작 몇 주 사이에 원격장치로 조종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또 우리 팀이 만든 로봇차는 어떤 모습일지 기대도 됐다. '물리캡스톤디자인'이라는 수업이었다. 로봇차를 만들어 경주를 벌이고, 등수대로 학점을 받는 프로젝트형 수업이었다.


복도에는 열댓 명의 학생들이 팀별로 모여 직접 만든 로봇 자동차를 조종하고 있었다. 직육면체 휴지곽 만한 로봇차 서너 대가 넓은 복도를 질주했다. 발목에 부딪히면 꽤나 아프겠다 싶을 정도로 빠른 속도다. 복도 중간중간에는 양쪽이 뚫린 종이박스가 놓여있었다. 경주하는 도중에 넘어야 할 장애물들이었다. 한쪽으로 들어갔다가 반대쪽으로 나오는 정도의 쉬운 난이도였지만, 문제는 조종을 맡은 학생이 로봇차를 따라다닐 수 없다는 데 있었다. 로봇차에 카메라를 달아 영상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며 조종해야 했다.


팔방으로 질주하는 멋진 로봇차를 넋 놓고 바라보다가, 손바닥 만한 작은 로봇차를 발견했다. '뽈뽈대다'라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느리게 복도를 부유하고 있는 보라색 로봇차였다.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우리 팀원 중 하나가 로봇차를 조종하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멋쩍게 인사를 나누고 로봇차를 집어 들었다. 꼭 세발자전거 같은 모양이었다. 뒤쪽에 두 개의 바퀴가 달려있었고, 앞쪽 중간에 작은 쇠구슬이 박혀있었다. 건전지를 네 개나 연결했지만 출력은 충분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곰개미가 부지런히 걸어가는 속도밖에 안 됐다.


부족한 건 노력이 아니었다. 인력이었다. 한 팀당 학생 3명이 배정됐는데, 내가 인턴 과정에 붙는 바람에 남은 2명이 모든 작업을 마쳐야 했다. 일단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점에서 인정받아 마땅했다. 다른 팀들이 어떤 성과를 냈는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제가 한 번 조종해봐도 될까요?" 리모컨을 넘겨받아 방향키를 눌렀다. 로봇차가 다시 뽈뽈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습도 할 겸 주행코스를 밟아보기로 했다. 긴 복도를 지나 첫 번째 종이박스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로봇차가 박스의 턱을 넘지 못했다. 당황한 팀원이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힘내라 울애긔


"우리 인생 같네요" 입담 좋은 팀원이 무안한 분위기를 환기했다. 몇 번을 시도해도 로봇차는 1cm도 되지 않는 작은 턱을 넘지 못했다. 문제는 앞바퀴 역할을 하는 쇠구슬에 있었다. 바퀴가 계단을 넘으려면 바퀴의 반지름이 계단보다는 높아야 했다. 엄지손톱만 한 쇠구슬로는 어림도 없었다. 긴급회의를 한 끝에 앞쪽 쇠구슬을 떼버리고, 후진으로 턱을 넘기로 했다. 차체가 바닥에 끌려 속도가 더 줄어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처음부터 우리의 관심은 우승이 아닌 완주에 있었다. 그렇게 로봇차는 세발자전거에서 달구지로 탈바꿈다.


연습 시간이 끝나고 출발선에 다섯 대의 로봇차가 도열했다. 교수님이 "시작"을 외치자마자 네 대의 로봇차가 중앙 복도를 빠져나갔다. 시범 경주 때는 카메라를 연결하지 않고, 직접 따라가면서 운전을 하는 게 허용됐다. 주변은 금세 한적해졌다. 1등 로봇차는 5분 만에 모든 장애물을 통과하고 출발지점으로 복귀했다. 그즈음 우리는 좀 전에는 넘지 못했던 첫 번째 장애물 앞에 도착해 있었다. 후진 운전은 좌우 방향이 정반대라 더욱 헷갈렸다. 엉덩이를 종이박스 입구 쪽으로 정렬할 다음, 후진 버튼을 눌렀다. 로봇차는 부드럽게 턱을 넘었다.


안도의 웃음이 나왔다. 로봇차가 박스 반대편으로 나오자 대견한 마음에 번쩍 들어 안아주고 싶었다. 손주가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볼 때 다들 이런 마음일까. 하나를 넘고 나니 둘은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차례차례 장애물을 넘었고, 레이스를 완주했다. 결승지점 앞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20분이 지나있었다. 경주를 마친 학생들은 잡담을 나누며 로봇차를 정비하고 있었다. 그때 교수님이 "박수"를 외쳤다. 순간 모든 학생들이 우리 로봇차를 보며 박수를 쳐주었다.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완주를 한, 꼴찌를 향한 진심 어린 축하의 박수였다.


솔직히 고백하면, 꼴찌는 당연한 결과였다. 애초에 꼴찌들이 모인 팀이었으니까. 우연히 모였지만, 팀원 모두 물포자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좋은 학점은 바라지 않았고, 졸업만 할 수 있으면  상관없었다. 완주가 목표였다. 로봇 자동차처럼. 팀원들은 한창 면접을 보러 다니고, 학점을 메꾸느라 바빠 보였다. 나도 인턴 최종면접과 20학점 어치 과제와 시험을 앞두고 있다. 끝까지 할 수 있을까. 두려운 마음도 든다. 그래도 별 수 있나. 어떻게든 완주해야지. 뽈뽈대면서, 막히면 후진을 해서라도. 꼴찌들의 달리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동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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