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버스에 탈 때마다 옆자리 승객의 팔이 댕강 잘리는 상상을 한다. 뒤에서부터 2인용 좌석 절반을 가르는 날카로운 칼날이 불쑥 튀어나와 내 공간을 침범한 옆자리 승객의 팔을 잘라버리는 그런 상상이다. 넘어온 정도에 따라 피해는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팔꿈치가 잘린다. 어떤 사람은 삼두박근이 날아가고, 한쪽 어깨를 통째로 잃기도 한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비명을 지를 새도 없다.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그들은, 본인에게 주어진 경계를 넘어섰다는 사실을 깨닫고 후회한다. 비로소 나는 만족스러운 공간을 얻는다.
현실로 돌아오면, 나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창문에 압착돼 있다. 혹은, 복도에 반쯤 튀어나와 상반신과 하반신으로 'K'자를 그리고 있다. 옆자리 승객이 이런 불공정한 경계선을 알아차리는 경우는 드물다. 대게 그들은 몸을 편하게 부풀린 채로 양손으로 편하게 휴대폰을 조작한다. 나는 마치 검을 뽑듯 한쪽 손을 완전히 접어둔 상태에서, 남는 손으로 겨우 휴대폰을 만진다. 하지만 잘못은 그들에게 있지 않다. 몸을 먼저 웅크린 건 나다. 몸이 닿는 걸 의식하면서 정신을 뺏기고 싶지 않아서, 혹시나 무례한 사람으로 비치고 싶지 않아서 공간을 먼저 내어줬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 그만큼의 공간을 차지했을 뿐이다.
몸을 웅크린 채로 한참을 있다 보면 문득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온다. 숨쉬기도 답답하고, 팔도 저려온다. 전에는 불편해도 곧잘 참았다. 앉아가기만 해도 감지덕지였던 시기였고, 굳이 하루의 시작에 서로 얼굴 붉힐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참고 버티는 게 호구라는 생각이 든다. 내리면 평생 안 볼 사람인데. 알아서 희생해야 하는 이유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직장인이 되면서 여유가 없어진 탓일까. 그래서 요즘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상반신을 일으켜 세우며 몸의 부피를 늘린다. 어깨로 어깨를 밀어내며 빼앗긴 영토를 단번에 되찾는다. 딱 중간 경계선까지, 옆자리 승객을 묵직하게 밀어낸다.
반응은 대게 두 가지 중 하나다. 자신이 경계를 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웅크려주거나, 욕이라도 들은 듯 황당하고 불쾌하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거나. 숫자로 따지면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며칠 전 출근길 만난 한 중년 아저씨는 엉덩이를 들어 중간지점이 어딘지 확인하고 공간을 내줬다. 그런 반응을 보는 게 썩 달갑지는 않지만, 불편은 한순간이다. 한 번 공간을 확보하고 나면, 그 이후로는 편안한 여정이 이어진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 의문이 들었다. 처음부터 웅크리지 않았으면 될 일 아닌가? 무언가를 줬다 뺏으면 선물이 아니듯, 받은 걸 도로 뱉어내라면서 배려라고 말할 순 없지 않나? 오히려 감정만 상할 뿐인데 말이다.
인간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잘 보이려는 마음에 먼저 움츠리는 사람들이 있다. 좋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기분 나쁜 말을 들어도 꾹 참는 등 끊임없이 자신을 희생한다. 하지만 인간이란 늘 밟히고만은 살 수 없는 존재라서 언젠간 '꿈틀'하게 된다. 그동안 너를 위해 얼마나 참았는데 너는 이렇게밖에 돌려주지 못하냐고. "내가 호구로 보이냐"고.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상대는 '마음 경계선'을 얼마나 넘어섰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마음의 부피를 되찾으려는 노력을 불쾌하게 여긴다. 원래의 위치로 되돌리려고 했을 뿐인데, 상대는 뺏긴다고 생각한다. 잘못은 그들이 아닌, 처음부터 공간을 내어준 우리에게 있다.
즐겁게 술을 마시려면 자신의 주량을 잘 알아야 하듯, 완주를 하려면 자신의 페이스를 잘 알아야 하듯. 오래가는 인간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디까지가 자신의 마음이 허용하는 한계인지 잘 알아야 한다. 그리고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그 경계를 잘 지켜내야 한다. 한 번 굳어지고 나면 좀체 돌이킬 수 없고, 돌아키더라도 큰 고통이 따르게 되기 때문이다. 마음의 경계는 엉덩이를 들어 어디쯤인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