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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HYE Jul 27. 2020

계단을 내려가며 넘어지는 나를 상상한다

한 발씩 내딛는 신중한 걸음, 미세하게 떨리는 둔부, 손잡이를 꼭 잡은 손, 아래로 고정되어 있는 눈동자.


지하철을 갈아타는 길 마주친 계단을 천천히 내려간다.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일어나지 않은, 하지만 언젠간 일어날지도 모를 사고’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한다. 앞구르기를 하면서 넘어지는 나, 엉덩이로 계단을 슬라이드 해버린 나, 무릎으로 넘어져 머리를 콕 박으며 넘어지는 나. 귀에 꼽은 에어팟으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면 이 허무맹랑한 상상이 끝나려나 생각해보지만 집중력이 흐트러져 넘어지게 될까 다시 시선은 아래에 꽂히고 귀는 닫힌다. 계단이 끝나고 나서야 긴장되었던 동공은 다시 앞을 향하고 갈아탈 지하철이 어느 방향인지 찾는다. 


이 알 수 없는 불안은 계단을 내려갈 때 이따금 찾아오는데 그 근거를 찾으려 할수록 희미해진다. 그리고 그 ‘이따금’은 넓은 기간에서 보면 ‘이따금’일 테지만 기억의 구절을 나눈다면 어느 때는 더 자주 떠오르기도 한다. 계단에서 넘어진 어렸을 때의 트라우마가 있는지 떠올려봐도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왜 나는 최악의 사태를 상상하게 되었을까.



그날도 그랬다. 교환학생 신분으로 미국에 머물렀었던 스물두 살의 겨울, 1학기가 끝나기 전 마케팅 수업의 마지막 발표가 있던 날. 꽤나 잘한다고 생각했던 일이었다. ‘무대체질’이라고 말해주는 주변 사람들까지 있었을 정도니까. 준비한 말들을 머릿속으로 나열하고 퍼즐 맞추듯 짜 맞추어 입 밖으로 내뱉는 일을 스스로 잘한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렇게 장담하던 내가, 순서가 돌아오기까지의 시간 동안 무대 앞 우스꽝스러워진 모습의 나를 상상했다. 그리고 그 상상의 대부분은 ‘실패’라고 불릴법한 것들이었다. (다행히도 발표는 무사히 끝났다.)


상상 속의 나는 나에게 참 잔인하다. 그리고 그 못된 나는 지치지도 않는다. 위태로울 수도 있는 상황에서 안전하게 착지하는 나보다 우당탕 넘어져버리는 나를 먼저 상상해버리고 말다니. 그 ‘불안’이란 존재는 언제나 불시에 찾아와 마음을 잠식한다. 말을 걸어보려 할 때마다 나를 농락하고는 거품처럼 사라진다. ‘언제쯤 예측 불가능한 이 존재를 예측 가능할 수 있게 될까, 예측이라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생각하다 이내 관둔다. 우리는 제각기 다른 불안들을 마음속 어딘가에 품고 살겠지. 불안을 품기에 때로는 더 큰 용기를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완전하지 못한 나를 탓하기를 관둔다.


계단을 내려가며 멈추지 않고 한 발 한 발 힘 있게 내디뎠으면 그걸로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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