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로 엮는 나의 삶 : 2006년 6월 10일
어제는 20년 만에 서울대 행정대학원 졸업을 위한 석사학위 논문이 최종 통과된 날이다. 86년에 입학해서 2006년 8월에 졸업하게 되니 만 20년이 걸렸다. 사실 나에게 서울대행정대학원 석사는 졸업해야 할 그다지 큰 실익은 없다. 이미 미국에서 공부하여 석사학위을 받았고, 박사학위도 학점취득을 마치고 논문 집필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서울대 행대 석사는 단순한 학위 취득을 넘어서는 각별함이 있다. 학교 입학시험을 보기 전날 심아와 함께 공부했던 기억과 함께, “등록금 내느라고 겨울에 회원이 업고 관악산 칼바람 맞으면서 고생했는데 당신은 다른 것은 다 잘하면서 행정대학원은 왜 마치지 못하는지 모르겠다”고 심아가 했던 말이 늘 마음에 걸렸었다.
수료라도 한 줄 알았는데 미국에서 박사 과정 입학서류에 붙이려고 수료증을 요청하니, 3학점이 모자라서 수료가 되어있지 않다고 했을 때의 허전함이라니... 확인해 보니 91년 천안 내무부 중앙민방위학교에 근무할 때 논문을 쓰려니 평점이 3.0 이상이어야 하는데 2.99밖에 되지 않아, C를 받은 『지방행정론』을 재수강했는데, 서울 내무부 본청으로 발령 나는 바람에 바빠서 논문도 쓰지 못하고 과목도 챙기지 못했더니 F 학점을 받아 수료학점인 30학점에 미달된 상태였다.
돌아보면, 서울대 행정대학원은 나와 내 가족에게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85년 육군 중위로 복무하던 중 시험에 합격했고, 공부하는 과정에서 심아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일과가 끝나는 5시, 부대에서 택시로 부랴부랴 의정부까지 간 후 전철 두 번 타고 낙성대역에서 내리면 다시 택시로 강의동까지 이동했다. 종종 택시비를 아끼려고 버스로 정문에서 내린 후 산 밑 강의실까지 반은 걷고 반은 뛰면서 헐떡이던 고단함이란...
늘 늦어 허둥댔었고, 수업 끝나고 나면 10시. 영만 형 등등 몇몇 동료․선배들과 생맥주라도 한잔 걸칠라치면, 의정부 가는 전철 시간 때문에 초조해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주 추운 학기말 밤 12시경 의정부 전철역에서 내린 후 시외버스터미널까지 걸어가면서 손을 호호 불었고, 터미널 앞 포장마차에서 허기를 달래려고 500원짜리 순두부에 소주 한잔이라도 먹고 부대에 가면 BOQ(영내 독신자숙소) 역시 냉방이라 새우잠을 자야 했다. 군생활 중에는 등록금을 내기 위해 매달 6만원씩 붓던 재형저축에서 돈을 빼려면 내 돈인데도 의정부 국민은행에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다. 그중 한 번은 설봉스님께서 내주셨다.
이 모든 일들 중에 심아와의 추억은 각별하다. 시험공부도 심아 옆에서 했었고, 내 대신 등록금 내려고 큰 애 업고 학교 언덕을 오르내리며 고생했던 심아는 91년 천안 중앙민방위학교에 근무할 때 봉급이 30만원 밖에 안되던 그 시절, 논문 쓰는 데 필요하다고 하니 150만원이나 되는 삼보 트라이젬 컴퓨터를 선뜻 사 주었다.
이처럼 군대에서 공주를 거쳐 천안에 이르기까지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이던 86년부터 92년까지 7년에 걸친 행정대학원 시절, 내 젊었을 때 나와 심아와의 소중한 추억이 깃들어 있는 그 시절이 내 경력에 ‘서울대 행정대학원 수료’라는 말조차 쓸 수 없는 의미 없는 시간으로 변해버린 데 대해 늘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심아에게 미안한 마음과 함께...
그래서 대전에 내려오면 제일 먼저 이것부터 하리라고 생각했다. 금년 1월, 행정자치부에서 충남도청으로 승진해 내려오는 것이 어느 정도 가시화되고 있을 때, 대학원 측에 학교를 마칠 수 있다면 무슨 조건이라도 수용할 테니 방법을 검토해 달라고 요청했고, 얼마 후 연락이 왔다. 재입학을 하면 한두 개 필수 과목을 수강하면서 논문을 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졸업논문을 쓰기 위해서는 정책이론세미나와 대학원논문연구 두 과목 6학점을 이수해야 했다. 이미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마쳤고, 20년 이상의 행정 경험과 자치분권 분야의 여러 정책적 연구 실적 등을 인정하여 학교 측이 내린 결정이었다.
재입학에 들어가는 돈도 만만치 않았다. 입학금, 수업료, 기성회비, 논문 심사료 등 모두 223만원을 내고 나니 미국 유학 후 복직하여 청와대에서부터 몇 년간 조금씩 모아 놓은 돈이 거의 바닥났다. 그래도 좋았다.
논문제출자격고사와 외국어시험을 91년에 이미 통과했으나 전산화된 학적에서는 확인하기 어렵다는 통보가 왔다. 대학원 직원에게 분명히 그때 논문을 쓰기 위한 모든 조건은 충족했었으니 다시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직원은 오래된 학적부 원본을 찾아보고 나서야 그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이제 논문 쓰는 일이 남았다. 처음에는 행자부에서 일하면서 관심을 가졌던 ‘주한외국인의 정착지원 방안’을 주제로 선정했으나 교수들로부터 그 주제는 정책의 영역에서는 대단히 의미 있는 주제이나 학위논문으로는 다소 추상적이므로 정책평가 분야로 주제 선정을 다시 하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그래서 미국 박사과정세미나에서 연구했던 ‘Empowerment Zone 프로그램 정책효과 평가연구’를 주제로 해서 한국의 사례와 접목시키기로 하고 논문작성에 들어갔다. 몇 차례 학교에 가서 발표와 토론을 하였다.
처음에는 미국에서 이미 연구했던 내용이라 쉽게 써질 것만 같았으나, 생각보다 어려웠다. 기억이 가물가물해진 내용을 다시 공부하면서 복원해야 했고, 통계처리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무엇보다도 나를 믿고 재입학을 허락해 준 학교 측, 또 명문 미시간대학에서 박사공부를 한 사람으로서의 체면을 생각할 때, 함부로 쓸 수 없었다. 더 많은 자료를 보고 정확히 인용하려고 노력해야만 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 드디어 어제 제출된 논문에 대해 최종 심사를 받았고, 이제는 논문 통과가 확정되고 인쇄를 해서 제출하는 일만 남았다.
제출 논문 제본 시 『특별본』을 하나 만들려고 했다. 이 모든 추억을 담은 글을 논문 첫 페이지에 따로 써넣은 것을 별도로 한 부 만들어 심아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당신 정말 고마워. 사랑해"라는 말과 함께. 그 논문을 받고 심아의 좋아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것을 상상하며 며칠 밤을 꼬박 세웠다.
무엇보다 Surprise Party를 위해서는 심아에게 말을 하지 않고 숨겨야 했다. 몇 번의 갑작스런 서울 출장에 대해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해도 그것이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여보, 미안해. 나 때문에 언제나 마음고생하게 해서. 왜 이렇게 자꾸 일이 꼬이는지 모르겠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말로 인해 더 상처를 주고 그것 때문에 점점 아파해 하는 당신을 보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당신이 원하니까 이제부터는 모든 것을 다 얘기해 줄게. 직장일도 다 얘기해 줄게. 버릇이 되지 않아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사실 나 그전보다는 많이 노력하고 있거든.
대전에 와서 당신 많이 힘들지? 그래도 나는 대전에서 우리 가족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 나는 대전에 내려와서 하기로 한 여러 가지 목표 중에 행정대학원졸업이라는 하나의 목표는 일단 성취했어. 그다음에는 지방간 없앨 거야. 그다음에는 미국에 연락해서 미시간대학의 박사 논문도 쓰기 시작할 거고. 그런데 아마 이것도 청와대에서 몇 년 바쁘게 일하느라 기한내에 마치지 못해 재입학 신청을 해야 할 것 같아.
우리 가족과의 관계에서도 더 잘할 수 있도록 할게. 그래서 조금이라도 당신 마음이 편해질 수 있도록 노력할게.
이제 모든 걸 당신하고 상의하면서 살아간다고 약속할게. 나는 당신 없으면 못살아. 그런데 당신이 자꾸 아파하고 약해지면 어떡해. 씩씩한 우리 심아, 내가 늘 당신 곁에서 지켜줄 테니 울지마.
주말농장 프로그램 시작했지? 운동프로그램 시작했지? 이제 심아 요리프로그램 시작해 보는 게 어때?
사랑해.”
2006년 6월 10일
못난 남편 재근이가...
@2006년 4월은 행정자치부 행정과정에서 고향인 충남도청 의회사무처장으로 금의환향(?)한 해이다. 1991년 사무관(5급)으로 내무부에 올라간 후 15년 만에 이사관(2급)이 되어 복귀하였다. 7월에는 의회사무처장에서 기획조정실장(고위공무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결국 서울대 행정대학원 석사 졸업은 행자부 과장 때인 1월에 재입학 절차를 시작하여 3월에 입학하고, 6월에 논문을 완성했으니 주말없이 밤 늦게까지 공부한 참 바쁜 시간이었다. 그래도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2006년 5월에 지방선거가 있어 지방의회 회기가 비교적 일찍 마무리되고 7월에 새 의회가 구성할 때까지 약 2개월 동안 의회사무처장 직위가 격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1995년과 96년 두 차례에 걸쳐 충남도의 국장으로 승진 부임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 나는 내무부에서 어렵게 유학 시험에 합격하고 미국 박사 공부를 꿈꾸던 상태라 두 번의 부름에도 고사했다. 2006년에야 복귀하였으니 한 번 기회를 놓치니 10년이나 더 걸려서 귀향하게 되었다.
내려와 달라는 말에 공부 더 하고 와서 더 잘 일하겠다면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던 심대평 충남지사님은 10년 뒤인 2006년에도 지사였고, 결국 사무관 때 모셨던 지사님을 거의 20년이 지나고서도 다시 모실 수 있었다.
존경하는 심지사님은 내가 지금 원장으로 일하고 있는 한국유교문화진흥원의 정책자문위원장으로 또 충청유교문화대계 편찬위원장으로 수고해 주실 것을 흔쾌히 수락하셨다. 사람 사이의 인연이란 그런 것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