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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집 할아버지의 회갑잔치

편지로 엮는 나의 삶 : 2010년 8월 17일

by 정재근
할아버지회갑잔치 (2).jpg


사진 폴더를 정리하다가 꼭 40년된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1970년 할아버지 회갑잔치 사진입니다.


논산군(시) 가야곡면 왕암리 235번지. 지금은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어버린 제 어린 시절의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제 할아버지 집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제가 대전 자양초등학교 4학년 때인데 할아버지 회갑연에는 꼭 참석해야 한다는 부모님의 방침으로 저와 동생 모두 학교에 결석했던 기억이 납니다.


할아버지 회갑 잔치에 일가친척들이 모두 모였는데요, 그 당시로서는 드물게 칼라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아버지 말씀에 사진사를 불러 찍게 했는데 무슨 이유에서 인지 그때 사진이 남아있지 않았답니다. 늘 아쉬워 하던 차에 몇 차례 이사를 하면서 짐을 정리 하던 중에 10여년 전 우연히 필름을 발견하셨답니다. 오래된 필름인데도 의외로 상태가 좋아 크게 확대해서 계룡집 거실에 걸어 놓고 작은 사진은 제가 가져와서 스캔해 보았습니다.


만국기가 날리고 있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앞줄에 앉으신 네 분의 할아버지들 중에서 왼쪽에서 네 번째 가운데 부분에 두루마기 입으시고 흰머리 가르마 하신 분이 제 할아버지입니다. 그 뒤에 두루마기 입고 서 계신 호리호리 멋진 분이 제 아버지이고 그 옆에 개구쟁이처럼 손 들고 있는 녀석이 저입니다.


저에게는 일종의 생가라고 할 수 있는 가야곡 집을 동네 사람들은 "새집"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새집 할아버지"이고 저는 "새집 손자"였습니다. 어렸을 때 하나도 새집이 아닌데 왜 동네 사람들이 새집이라고 부르는지 늘 궁금했습니다. 그 이유를 나중에 우리 집안 내력과 대소사에 관해 집안 어르신들과 얘기할 수 있는 정도의 나이가 되었을 때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증조할아버지께서 할아버지 형제들 공부를 다 잘 시키셔서 4형제 모두 객지에서 취직을 하거나 공부를 하고 있었답니다. 제 할아버지도 당시 아주 좋은 학교를 나오고 충분히 서울에서 취직을 할 수 있었답니다. 그런데 증조할아버지께서 "모두 내 곁을 떠나니 나를 도와 농사지을 자식도 없고 쓸쓸하다"는 말씀에 둘째이신 할아버지가 "그럼 아버지, 제가 취직하지 않고 아버지랑 같이 농사 지을께요."라고 하셨답니다.


증조할아버지께서 얼마나 좋으셨던지 당신 집은 초가집이면서도 할아버지에게는 기와집을 지어 분가를 시켜 주셨답니다. 지금 보면 보잘 것 없는 것 같지만 그 당시 동네에서 제일 먼저 생긴 기와집이었고, 규모는 크지 않지만 사랑방과 행랑채가 있고 뒤뜰에는 제사 과일인 밤나무, 대추나무를 심었고 문밖에는 감나무까지 있는 전형적인 중부지방 중농 집안의 가옥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는 그 똘똘한 할아버지가 증조할아버지 모신다고 대처로 가지 않고 고향에 눌러 앉은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자기 자식들도 그랬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새집"이라고 부르는 데는 일종의 부러움, 존경 이런 것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할아버지는 동네 유학자의 역할을 톡톡히 하셨던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기억에 이웃집에서 축문이나 지방을 써 달라고 찾아오면 할아버지께서는 새끼를 꼬다가도 "아무개야, 잠시 기다리거라" 하시고는 깨끗이 손 씻고 의관 갖추고 정성스레 써서 주시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사진 속의 고향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이제 한 두 분만 남고 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래도 생매 할아버지, 바구재 할머니, 배추간이 할머니, 쇠머리댁, 봉상댁 등등 정감어린 택호는 마음으로라도 저를 한달음에 고향으로 달려가게 합니다.


매년 가을 시제때 어르신들을 뵈면 소 혓바닥처럼 거칠거칠한 손으로 제 손을 꼬옥 잡고, 새집 할아버지, 돌쇠댁 손자라고 부르시며 나랏일 잘 하라고 부탁하시곤 하시던 분들입니다.


아무 조건 없이 그저 당신들 터에서 자라고 당신들 피를 섞어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저를 사랑하시고, 지금도 당신들의 먼 옛날 기억에 똘똘하게 재잘재잘 나불거리면서 재롱떨고 노래 불러 주던 꼬마 녀석이 그저 대견하기만 한 이런 어른들이 제 마음속에 있는데 어찌 딴맘 먹고 헛길로 갈 수 있겠습니까?


올가을 시제에는 예년처럼 한산 소곡주나 가야곡 왕주 두어 말 들고 재실(저희 재실의 이름은 효사재孝思齋 입니다)에 찾아 뵙지는 못해도 저를 아끼시는 고향 어르신들을 생각하며 이곳 베를린에서나마 고향 관련 詩라도 한 수 지어볼까 합니다.


2010년 8월 17일 베를린에서 고담 정재근


@ 2010년 1월부터 베를린에 있는 주독일대한민국대사관의 공사겸총영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독일에 가기 전에 맡았던 행안부 대변인의 직책은 대단한 격무였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의 국장을 치르면서 정부대변인으로 역할을 잘 수행한 후, 고향의 부지사로 가기보다는 외교부와 대사급 교류를 시행하여 외교관으로 일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행안부 일반직고위공무원을 퇴직하고 외교부의 고위외무공무원으로 임용되는 절차를 거쳤다. 베를린에 부임하여 6개월 정도 지나 어느 정도 안정되었을 때 수년간 쌓여있던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이 사진을 보는 순간 갑자기 향수병이 일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글 마지막 부분 “아무 조건 없이 그저 당신들 터에서 자라고 당신들 피를 섞어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저를 사랑하시고, 지금도 당신들의 먼 옛날 기억에 똘똘하게 재잘재잘 나불거리면서 재롱떨고 노래 불러 주던 꼬마 녀석이 그저 대견하기만 한 이런 어른들이 제 마음속에 있는데 어찌 딴맘 먹고 헛길로 갈 수 있겠습니까?”는 언제나 나에게 유혹을 견디게 하는 힘의 원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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