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로 엮는 나의 삶 : 1999년 9월 6일
사랑하는 손자 OO, OO아 보아라.
할머니는 8월 19일 공항에서 미국 식구들 보내고 너무 섭섭해 눈물이 앞을 가리고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 이루 말할 수 없더구나. 할아버지가 눈치를 채시고 애비만 유학 간 게 아니고 손자 놈 둘도 유학갔다면서 “온 식구가 다 간 게야, 즐거운 일이지” 하시며 할머니를 위로하셨다.
할머니는 그날 공항리무진을 타고 대전으로 왔다. 저녁 8시쯤 되었을까, 빈집에 미국 식구들은 간곳없고 어질러진 빈방과 귀여운 손자들이 물 떠 마시던 빈 병 만이 주인 없이 식탁에 쓸쓸히 있더구나.
23일이 증조할머니 제사라 준비하느라 많이 바쁘고 힘들었다. 엄마 생각이 많이 나더구나. 할아버지는 당진으로 가시고 농사일 때문에 올여름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땀을 너무너무 많이 흘렸는데, 그 땀은 아주 값진 땀으로 생각한다. 힘들지만 미국 식구들과 고모들이 열심히 잘 살아 주어서 힘든 줄 모르고 일을 한 것 같다. 그러니 회원이 회문이는 공부 열심히 하고 아빠 엄마 말씀 잘 듣고 할아버지 할머니를 즐겁게 해야 한다. 참 그리고 OO이 꿀돼지가 감기에 걸렸다니 안쓰럽고 보고 싶구나.
여기는 아직도 무덥다. 비가 와서 고추를 방에다 불을 넣고 말리고, 고추와의 전쟁이다. 지금 고추 딴 것이 100근을 땄다. 벼는 고개를 숙이고 김장배추도 심어서 뾰족이 나왔다. 비가 와서 시간이 있어 그나마 편지를 쓴다. 올가을 미시간 단풍이 예쁘게 물들겠지. 할머니도 미시간이 그립구나.
아빠 엄마한테 안부 전하고, 미국 식구들 몸 건강이 잘들 지내기를 자비하신 부처님께 기도하마.
이만 안녕. 할머니가.
1999년 9월 6일
@ 1999년 9월은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한 해이다. 1997년 9월부터 미시간대 건축및도시계획대학의 도시계획학 석사과정에서 공부 중, 98년 겨울, 여러 대학에 박사과정 지원을 하였다. 99년 봄, 미시간대를 포함 몇 개 대학에서 입학허가를 받았으나, 같은 학교에서 박사 공부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행정자치부 과장 신분으로 국비 유학 중이던 내가 박사 공부를 위해서는 정부에서 박사과정 휴직 승인을 받아야 했다. 정부의 유학 지원은 2년 한정이므로 휴직을 위해서는 박사과정 입학 허가서를 지니고 귀국하여 박사 공부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 설명해야 했다. 이를 위해 99년 여름 석사학위 취득 후 방학을 이용하여 한국에 들어왔다 다시 출국했다.
이 편지는 당시 63세의 어머니가 손자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67세의 아버지는 공무원 은퇴 후 당진읍의 한 도계장에서 수의사로 일하실 때이다. 두 분은 당진 기지시의 한 농가 옥탑방에 사시면서 벼농사와 고추 농사도 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