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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쥬네 Mar 07. 2023

별로인 사람이라서

양육자가 될 수 없는 이유





나이가 그런 나이가 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사람들은 그저 궁금한 걸까. 지난해 자주 들었던 질문은 출산에 관한 것이었다.


‘왜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인지, 언제쯤 아이를 낳을 것인지, 출산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아이를 낳지 않으면....(...)‘



어느덧 결혼 6년 차, 이 사회에서 이 정도 시기에 아이를 양육하는 건 당연한 일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사람들은 왜 궁금해하는 건지. 단순한 궁금증인지, 궁금증 이면에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는 건지.‘ 출산과 양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나면 괜스레 꼬인 마음이 자라난다. 나 홀로 대화를 곱씹어 복기하다 보면 마음 한켠이 불편해진다. 알 수 없는 채무의 감정이 쌓여간다. 출산과 양육은 아직 나에겐 부담스러운 영역이라고 선긋기와 동시에 나는 양육자가 될 수 있을지 진지한 고민을 한다.




주변에서 출산에 관한 질문을 할 때면 나는 ‘양육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다. 남편과 보내는 시간이 더 좋다.‘고 대답한다. 철저히 나의 가준에서 출산을 할 수 없는 현실적인 조건만 생각했다. 적어도 단테(반려 고양이)와 함께 살기 전까지, 내가 고양이 집사가 되고 반려동물과 함께 생을 살기 전까지 말이다.






삼일절 펄럭이는 태극기가 신기한 단테


생명도, 동물도 살아 있는 건 나의 관심영역이 아니었다. 어쩌다 남편의 바람에 이끌려 고양이와 반려하는 삶을 살게 되었지만 그때는 미처 몰랐다. 이전까지는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감히 출산과 양육에 비교할 바가 아닌 육묘의 영역이지만, 단테와 함께 하면서 내가 양육자가 될 수 없는 이유를 더욱더 실감하게 됐다.



고양이와 반려하는 삶은 행복할 때도 많지만 그만큼 자주 무너질 때도 많다. 내가 가장 크게 느꼈던 감정은 수치심. 그리고 남편에게 자주 했던 말은


“나 진짜 쓰레기인 것 같아.”

“단테 덕분에 내가 얼마나 별로인 사람인지 알게 되는 것 같아.“


이 사실을 모른 채 임신과 출산을 하고 양육자가 되었더라면 #금쪽같은내새끼 에서 금쪽이는 아이가 아닌 부모 금쪽이로 내가 출연했을 거다. 쓰레기 마미로 방송탈 뻔!



비록 단테가 사람은 아니지만 육묘를 통해 양육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느낄 때가 있다. 대분류의 동물, 소분류의 고양이 단테는 우리 집안의 구성원이자 친구이자 때론 자식 같은 존재다. 대분류의 인간, 소분류의 여성 즉, 나는 출산을 할 수 있는 신체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래서인지 출산과 양육, 엄마의 역할이 머릿 속에 떠오른다. 남편과 단 둘이서 살다가 고양이라는 생명체가 우리 삶에 들어왔다. 사람 둘도 여전히 투닥거리며 사는데 둘에서 셋이 되는 것, 사람과 반려묘가 맞춰가는 삶 또한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뿌리가 다른 고양이와 인간이지만, 단테가 우리에게 오게 된 이유를 생각하다 보면 양육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반려하는 삶, 생명을 길러내는 삶까지 확장되어 진지하게 고민한다.


‘나는 과연 괜찮은 양육자가 될 수 있을까?’

더 나은 양육자가 되라고 트레이닝을 시키려고 단테가 와준 것 같기도 하면서, 때론 건강한 양육자가 될 수 있도록 단테가 나를 키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단테는 고양이의 탈을 쓴 인간인가!







어쩌다 우린 하나의 침대를 나누어 쓰는 사이가 됐다. 같이 눈을 뜨고, 같이 눈을 감고, 같이 숨을 쉬고, 서로의 살결을 느끼고 애정을 주고받으며 보이지 않는 감정을 교류하며 함께 생을 나아가는 가장 가까운 사이로 살아간다. 하지만 지난 1년을 돌이켜 보면 가까운 생명에게 나는 참 별로였고 여전히 때로는 더 못난 바닥을 보여준다. 저스트 트래쉬!



집사가 되어 육묘한다고 내가 단테를 키우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사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단테가 나를 키우고 있었다. 내가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단테에게 받은 것이 더 많았다. 어리숙하고 미숙한 건 나였다. 내가 생명을 키우기에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얼마나 더 까지고 부서지고 다듬어져야 하는지 단테는 내게 매일매일 알려줬다. 폭발하는 화산처럼 감정이 넘칠 때마다 그 화산이 폭발하고 잠잠해지고 나서야 깨닫는다. 가장 밑바닥을 보이고야 안다. ‘나 방금 최악이었구나.’ 트래쉬 갈비지 뜯는 갈비 아니고 리얼 갈븨지







혼구녕이 나고서도 이 생명체는 뒤돌아서면 백지장이 되는가 보다. 배가 고프고 졸리면 내게 다가와서 부비적 부비적 애교를 부린다. ‘단테는 소중해, 특별해, 최고야, 사랑해’ 온갖 애정이 담긴 말들과 함께 쓰다듬어주면 단테는 온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골골골 아름다운 골골송을 부른다. 하지만 우리의 평화로운 시간이 지나가고 평행선을 걸을 때면 나는 왜 그렇게 화가 날까. 집사인 친구들에게 육묘에 관하여 토로하면 ‘아직 아가라서 성묘가 되면 괜찮아진다고, 1년만 기다려주고 참으면 된다’고 위로의 말을 해준다. 하지만 단테와 겨루는 씨름이 너무 버겁고 그러다 보면 생각의 꼬리는 나의 출산과 양육으로 이어진다. 고양이는 성묘가 되기까지 고작 1-2년인데 인간은 최소 20년 이라니! 끔찍하다. 생명이 끔찍한 게 아니라 생명을 키우는 과정에서 다듬어지지 않은 날 것의 나를 매일 마주할 자신이 없어진다.




그래서 요즘은 내가 출산을 할 수 없는 이유를 한 줄로 요약하고 구구절절 설명한다.


“저 트래쉬예요.“


하나뿐인 고귀한 생명을 길러내려면 내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단테 덕분에 깨달았다고. 내가 양육자로서 준비가 되지 않았고, 형편없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이제부터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 정도 해야 할 것 같다고. 현재는 그런 과정 중에 있다고. 그런 마음으로 매일 노력하다 보면 조금은 더 괜찮은 양육자가 될까 싶어서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고. (아직은 자격이 없음. 자격취득 중)



단테가 아니었다면 집사가 되어서 육묘를 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생명의 소중함이다. 그리고 다정함과는 거리가 먼 나란 인간은 생명의 고귀함을 몰랐을 거지만 덕분에 알아 가고 있다. 자기애 폭발, 나 이외에 다른 생명체가 숨 쉬는 것, 살아 있는 것 놉 노관심이에요! 이랬던 나를 단테가 변해가게 하니까 참 생명의 힘은 신비롭고 위대하다는 걸 배워간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 집은 매일 열탕과 냉탕의 반복이다. 적당히 뜨뜻하게 살고 싶다. 노력해. 야. 지! 그렇게 살려면 참아 내. 야. 지! 김호영님의 #해야지



어쨌거나 진정한 육묘는 내가 아니라 단테가 찐으로 육른(어른을 길러냄. 나 새끼 길러냄)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단테가 우리 가정으로 와줘서 그나마 나는 어제보단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 중이라는 것. 묘생이든 인생이든 완벽한 완성은 없으니까 나는 매일 1mm만큼 자라는 집사가 되어 볼 것이다. 그렇게 살다 보면 이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은 양육자가 될 것 같아서 출산하는 날도 오지 않을까. #기록하는집사#출산은알아서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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