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여행 프롤로그

by 바보

크리스마스라면 누구나 특별한 날이 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법이고, 특별한 일을 기대하면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그런 오묘한 이치를 이해할리 만무한 H군은 크리스마스에 소스라치게 놀라운 일이 일어나지 않았음에 실망하곤 한다. H군도 성인이 될 쯤이면 이런저런 실망의 날들이 더해지며 오묘한 이치를 깨닫게 되겠지. 그러면 자연스레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설렘도 사라지겠지. 과연 그게 좋은 일인지는 무척 의문이지만.

결코 함부로 설레지 않는 내가 이 새벽에 깬 것은 아마도 프랑스 여행을 앞두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사진으로만 보던 에펠탑과 모나리자를 내 눈으로 보게 되기까지 오래도 걸렸다. 20년 전에 도전했다 고꾸라지고, 또 10년 전에도 한차례 미끄러졌다. 두 차례 크게 고꾸라지고서는 포기하는 마음도 생겼었다. 이번 생은 아시아를 벗어나지 못하는가 했다. 샹젤리제! 모나리자! 에펠! 베르사유! 이들을 진정 내 눈으로 볼 수 있단 말인가?


기대하면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오묘한 이치를 이미 깨달은 나인데.. 기대하면 기대한 만큼 실망이 커지는데.. 그래서 기대하지 않아야 하는데 자꾸 기대가 된다. 누가 재밌다 해서 본 영화는 늘 기대 이하였고, 누가 맛있다 해서 기대하고 한입 깨문 입안에선 실망감이 퍼졌었다. 아직 비행기 타려면 한참 남았는데 벌써부터 이러면 곤란하다. 실망하면 어쩌지? 지금이라도 취소할까?


그놈의 '아이 러브 스쿨'때문에 초등학생 시절의 첫사랑을 만났더랬다. 초등학생 때 기억으로는 무척 귀엽고 애교가 많았던 내 첫사랑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적잖이 충격을 받고 실망했던 나는 때로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겨두는 쪽이 좋을 때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날의 나는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를 백번쯤 곱씹으며 집으로 돌아왔고, 다시는 연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날이 또 다른 추억이 될 만큼 긴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흐르고서 다시 생각해보니 서로에게 실망했던 그 날의 우리가 참 사랑스럽고 귀하게 느껴진다. 또한 귀한 깨달음도 얻을 수 있었으니 세상에 안 좋은 경험이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에펠탑과 모나리자가 실망감을 안겨줄지도 모른다. 그러면 뭐 어떤가? 수십 년간 기대한 것들이 사실은 별거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는 놀라운 경험을 갖고 돌아오겠지. 그래. 일단 가보자. 세상에 안 좋은 경험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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