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시간에 대한 고찰
아인슈타인은 시간이 절대적이지 않다 했다. 중력에 의해 느려지기도 빨라지기도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게 지구를 벗어나지 않는 한 영화 '인터스텔라'처럼 나의 한 시간이 타인의 7년이 되는 엄청난 시차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뇌가 시간을 객관적으로 인지하지 않기에 적어도 10배 정도의 체감상의 시차가 발생한다는 게 개인적인 의견이다. 우리 뇌에는 시계가 없고, 대신 오감을 통해 인지한 외부세계의 데이터를 분석해서 시간의 흐름을 추론할 뿐이다. 게다가 우리 뇌는 기분, 상황, 호르몬 등의 영향을 받아서 시간의 흐름을 일정하게 인지하지 못할 가능성이 아주 아주 많다.
물리학이나 뇌과학은 천재들의 영역으로 여겨 감히 들춰보지도 않던 내가, 바로 오늘 느닷없이 시간의 상대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된 계기는 이렇다.
어젯밤 10시 아내가 친구와의 모임이 끝나가니 데리러 와달라 부탁을 했다. 여자들은 남편에게 사랑받고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또한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한다. 이런 알량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버스가 끊길 시간도 아닌데 이런 귀찮은 부탁을 한다. 그런데 어제는 비도 왔다. 비 오는 날 친구들과의 모임이라면 그냥 가주는 게 장기적인 이익이 크다 판단했다.
모임 장소에 도착해서 일단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문자를 보냈다.
나: 나 도착
아내: 마지막 잔 마시고 있어
지하 주차장에서 계속 공회전을 할 수 없어 엔진을 껐다. 에어컨이 꺼지니 급속히 더워졌다. 답답함을 느껴 습관적으로 창문을 열었다. 실수였다. 덥고 축축한 공기가 차 안으로 잔뜩 들어왔다. 창문을 닫았다. 더 덥고, 더 축축하고, 더 답답했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시계를 보니 10분이 흘러 있었다.
너무 더워서 에어컨을 잠시 켰다. 지하 주차장에서 공회전하는 건 아무래도 양심의 가책이 심했다. 그래서 조금 틀다가 껐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공기가 더운데 곰팡이 냄새도 났다. 창문을 열었다. 실수였다. 곰팡이 냄새의 출처는 안이 아니라 바깥이었다. 문을 닫았다. 더 덥고, 더 축축하고, 더 답답한데, 냄새도 고약했다. 시간이 더 느리게 흘렀다. 시계를 보니 5분이 흘러 있었다.
지상으로 올라와 상가 주변을 서행하며 오랜만에 바깥세상 구경을 했다. 술 취한 여자가 바닥에 뻗어 있었고 일행으로 보이는 다른 여자는 옆에 같이 누우려는 건지 아니면 일으켜 세우려는 건지 모를 바쁘고 실속 없는 움직임으로 곁을 지키고 있었다. 상가를 반 바퀴를 더 돌았더니 편의점이 있었다. 게토레이 하나를 사서 갈증을 달랬다. 사실 마시고 싶은 건 포카리 스웨트인데 늘 게토레이가 더 싸서 늘 게토레이를 택한다. 시간이 많으니 그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봤다. 대다수가 포카리 스웨트를 선호하기에 더 비싼 거라 혼자 결론지었다. 같은 이유로 코카콜라보다 펩시가 더 저렴한 것이리라. 음료를 다 마시고 상가 주변을 두 바퀴 돌았다. 여전히 주차할 곳이 없었다. 어쩌면 내차가 들어갈지도 모를 작은 틈이 있긴 했으나 경솔한 판단이 가져올 끔찍한 결과를 잠시 상상한 후 다시 덥고 축축한 지하 세계로 내려갔다. 시계를 보니 20분이 흘러 있었고, 5분쯤 더 기다리다 문자를 한통 더 보냈다.
나: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아내: 지금 계산했어
다시 기다림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너무 시간이 안가 음악도 들어본다. 하지만 귀에 잘 안 들어온다. 차에서 내려 괜히 지하주차장을 뱅글뱅글 돌아본다. 계단도 오르락내리락해본다. 별별 짓을 다 하다가 시계를 보면 시간이 멈춰있는 듯하다. 계속 시계를 봐서 시간이 안 가는 것 같아서 보지 않고 기다리기로 했다.
엄청난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참다못해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아내는 지금 나가고 있다 대답했다. 그리고 엄청난 시간이 또 흘렀다. 분명 1분이면 도착할 거리인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시계를 보지 않아서 실제로는 1분인데 길게 느껴지는지 아니면 아내가 거짓말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대단히 긴 시간이 흘러서야 아내가 나타났다. 어쩌면 걸어가는 게 더 빠를 만큼 가까운 곳에 사는 친구를 굳이 태워주겠다고 데리고 왔다. 사랑받는 여자임을 자랑하고 싶은 불순한 의도가 보였다. 일단 친구를 미소로 배웅하고 나서 쏘아붙였다.
"마지막 잔이라더니 거짓말했지? 나 한 시간도 넘게 기다렸어!"
체감 시간은 영겁의 세월이었다.
"시간이 벌써 11시가 넘었어? 진짜로 마시던 것만 다 마시고 나온 건데?"
눈빛이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잔뜩 듣고 왔다며 조잘조잘 이야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내가 듣기에는 그다지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아내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왔음은 알 수 있었다. 아내가 밀러 행성에 다녀온 게 아니기에 물리적 시간의 왜곡은 아닐 테고, 단지 심리적 시차가 발생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만약 내가 느낀 만큼의 긴 시간을 본인도 느끼면서 이렇게 늦게 나타났을 리 없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사람도 아니다.
재미있고 즐거운 시간은 짧게 느껴지고 지루하고 고된 시간은 길게 느껴지는 건 과학적인 입증은 안되었어도, 별로 반박하는 이가 없는 듯하다. 옥시토신이란 호르몬이 시간을 짧게 느끼게 만들며 사람들과 어울릴 때 옥시토신 분비가 활발해진다는 연구 결과는 있단다. 동일한 시간이 때로는 짧게 또 때로는 길게 느껴짐을 '어떤 식으로 증명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히 의심스럽지만, 지루한 시간이 길게 느껴지는 것만큼은 경험상 확실하다! 그게 사실이 아니라면 국방부 시계는 왜 느리게 흐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