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이 지나 다시 본 영화
영화관에서 두 번 관람한 영화는 봄날은 간다가 유일하다. 사랑에 서툴러 아파하던 스무 살의 내가 절절히 공감하며 위로를 받았던 영화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다시 보지 않았다. 풋사랑의 시기는 이미 지났으니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생각했었던 것 같다.
20년도 더 지난 오늘, 아침부터 비가 와서 마음이 촉촉해졌고, 스무 살의 나는 왜 그 영화를 그렇게 좋아했던 걸까 문득 궁금해져 다시 보게 되었다. 여차하면 끌 요량으로 리모컨을 한 손에 쥔 채 영화를 시작했는데 예상외로 흥미로워 리모컨을 내려놓고 빠져들었다.
1. 자료화면으로 잊을만하면 사용되는 '라면 먹을래요?'와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장면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따지고 보면 길지도 않은 대사 두 문장을 기억하고 있을 뿐인데 내 기억 속에 있다 생각하고 있었으니 이 얼마나 오만인가. 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추억을 알게 모르게 잊으며 지내고 있을까?
2. 영화 봄날은 간다를 젊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 영화에서 꽤나 비중이 큰 역할이 할머니였음에 꽤나 충격을 받았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던 봄날의 기억만 남은, 멋없는 표현으론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영화의 뼈대를 이룬다. 그 외에도 여러 할아버지 할머니가 등장하여 때로는 명대사로 때로는 노랫가락으로 사랑과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왜 스무 살의 나에겐 보이지 않았던 걸까?
3. 사랑이 남긴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았던 스무 살의 나는 영화관 구석진 자리에서 홀로 울었다. 사랑이 끝났으니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그런 내 아픈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아 위로가 되었다. 철저히 스무 살 남자의 시각으로 영화를 봤었던 것 같다.
4. 여자의 마음이 보였다. 이혼의 아픔을 겪었고, 멀리 강릉에서 홀로 단칸방 살이를 하고 있으며,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유대도 없다. 운전을 하지 못하고, 차도 없다. 집을 깨끗하게 정돈할 정도의 마음의 여유가 없다. 거의 라면으로 끼니를 때운다. 술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마시는데, 방안에는 술병이 어지럽다. 그러니 인스턴트 사랑을 나누는 것 정도가 여자 마음속 여유 공간이 아니었을까?
게다가 그 남자가 일하다 만난 연하의 남자라면, 그 남자는 너무나 먼 곳에 살고 있다면, 사회생활 연차가 쌓이지 않아서 직장 상사에게 핑계를 대지 않고서는 데이트할 시간도 마땅치 않다면,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없어서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님 집에서 살고 있다면, 게다가 그 남자는 연애 초보라서 시종일관 뚝딱거리고 철없는 모습을 모인다면, 그렇다면 오로지 그 남자의 불타는 사랑만을 바라보며 미래를 그리기 쉽지 않겠다 싶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니 남자의 진심 어린 사랑을 가지고 노는, 혹은 어장관리 하는 요물로 생각했었던 그 시절의 내가 참 어렸구나 싶다.
5. 할머니는 할아버지와의 사랑을 추억하고 또 추억한다. 너무나 핑크빛 사랑이었냐면 그렇지도 않다. 할아버지는 바람이 나서 할머니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러니 마냥 행복했기에 그리워하는 게 아니다. 그냥 봄이 그리운게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봄날이 그리운 것이다. 화창한 날도, 구름 낀 날도, 비 오는 날도 다 그리운 것이다.
만개한 벚꽃처럼 아름다운 시절이 그리운 것이야 당연하고, 지나고 보니 다투고, 헤어지고, 울고, 그리워하고, 술에 비틀거리기도 했던 그 시절 모든 순간이 그립다.
6. 내 남은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 오늘이다. 그러니 어쩌면 먼 훗날에는 오늘을 그리워할지 모를 일이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너무 늦기 전에 제대로 살아야겠다. 내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기억에 새겨야겠다. 그 사람의 향기를 잠잠히 맡아봐야겠다. 서로를 바라보고 앉아 사랑을 이야기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