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여행기 모음집 - 인도(6)
인도를 여행할 때, 내게는 이상한 신념 같은 것이 있었다. 바로 한국 사람과 어울려 다니지 않겠다는 것이다. 일상의 소중함을 알기 위한 여행이 되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최대한 벗어나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속한 사회와 내가 사용하는 언어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떠나려고 했다. 그러한 신념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깨져버리고 말았다. 막상 익숙한 것들로부터 떠나보니 모두 것들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한국의 맛, 한국말, 한국의 가족들과 친구들. 익숙한 것들의 소중함을 알기 위한 여행의 목적이 생각보다 일찍 달성되어 버린 것이다.
델리에서 맥그로드 간즈로 떠날 때, 한국인 몇 명과 같은 버스에 타게 되었다. 오늘의 주인공인 S군과 D군, 그리고 M군이다. 낯을 가리고 말수가 적은 나에 비해 외향적인 성격인 그들은 먼저 나에게 “한국분이세요?”라고 말을 걸어 주었다. 속으로는 소리를 지르고 싶을 만큼 반가웠지만, 감정을 숨기는 데에 익숙한 내 성격과, 당시에 갖고 있던 이상한 신념 때문에 형식적인 인사치레와 소개만 그치고 버스에 타게 되었다.
이들과 친해지게 된 계기가 된 것은 버스에서의 한 사건 덕분이다. 인도를 여행하는 대부분의 한국인은 이른바 ‘물갈이’라는 것을 경험한다. 인도의 음식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의 몸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복통으로 인해 화장실로 달려갈 수밖에 없는 무서운 질병이지만 한 번 겪고 나면 인도를 떠날 때까지는 물갈이를 겪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S군에게는 물갈이가 조금 일찍 찾아왔던 모양이었다. 델리에서 맥그로드 간즈까지는 버스로 16시간이 걸리는데, 새벽 3시 즈음이었나, 잠에 취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S군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휴게소…휴게소가 언제인지 물어봐 줘.”
나는 영어를 아주 잘 하지는 못하였지만, 인도를 몇 주 여행한 끝에 어느 정도 의사소통하는 법을 터득했었다. 그래서 S군은 나보고 운전사에게 휴게소가 언제인지 물어봐 달라고 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새벽 3시에 잠에서 깨어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도 하지 못하는 나는 귀찮아서 아마 곧 도착하지 않을까, 하며 얼버무리고 그를 안심시킨 뒤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다시 그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휴게소…제발…아니면 차를 세울 수 있는지라도…”
그때 그의 표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는 곧바로 잠에서 깨어, 운전사에게 달려간 뒤 휴게소가 언제인지 물어보았다. 내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든 표정이었다. 다행히 운전사는 곧 도착할 것이라고 말했고, 다행히 그 말은 진실이었다. 휴게소에 들린 후 S군의 표정은 한결 밝아졌다.
휴게소 사건 이후로 전우애 같은 것이 생겨, 맥그로드 간즈와 마날리에서는 이 친구들과 동행을 하게 되었다. 내가 짧은 영어로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상 나는 이 친구들로부터 받은 도움이 더 많다. 이 친구들과 함께 여행하면서 알게 된 것은, S군이 바로 흥정의 천재라는 사실이었다. S군은 정말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물건을 사는 데 성공했다. S군과 함께 다니며 인도 여행을 하면서 나는 그동안 얼마나 물건을 ‘잘못’ 사 왔는지를 깨달았고, 또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또 얼마나 많은 돈을 날렸을지 깊이 통감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이런 일이 있었다. 인도풍의 바지를 사기 위해서 쇼핑을 하러 갔을 때였다. 나는‘No Discount’라고 가게에 써 붙어져 있었기 때문에 표시된 가격인 400루피를 주고 바지를 사서 나왔는데, 그 친구들은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서 절반 가격으로 바지를 사서 나오는 것이다. 할인되지 않는다고 분명히 쓰여있었는데 어떻게 한 것이냐고 물어보니, 그 친구들은 그런 게 어딨냐며 나를 보고 웃는 식이다.
그 이후에도 흥정 천재들은 정말 불가능한 많은 일들을 해냈다. 숙소를 시가의 절반으로 구하고, 내가 받았던 가격의 5%도 되지 않는 가격으로 헤나를 받고, 식당에서는 음식을 하나 더 서빙 받았다. 가장 분했던 기억을 꼽자면, 어머니 선물로 900루피짜리 울 스카프를 샀을 때였다. 그 친구는 같은 가게에서 방금 구매한 울 스카프를 구매했던 내가 떡하니 보는 앞에서, 친구가 스카프를 샀으니 자기에게는 더 싸게 해주어야 한다는 논리로 열심히 흥정하더니 결국 울보다 훨씬 질이 좋은 캐시미어 스카프를 800루피에 구매했다. 이런 일들의 연속이었다.
내가 흥정에 대해서 전혀 문외한인 것도 아니었다. 인터넷이나 심지어 여행 책자에서도 흥정의 방법이나 기술들을 접할 수 있었다. 처음에 절반 가격을 제시한다거나, 물건을 사기 직전에 떠나려고 한다거나 이런 기술들 말이다. 하지만 연애소설을 아무리 많이 읽는다고 연애를 잘 하는 것은 아니듯이, 흥정도 이론보다는 경험이었던 것이다. 그들로부터 내가 깨달은 것은 이런 것들이다. 흥정은 기술이 아니라 타고나는 것이다. 아무리 많이 읽고 공부해도 소용이 없다. 심지어 파는 사람의 언어를 더 많이 알고 있어도 소용이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렇게 해서는 배울 수 없는 것이었다.
인도를 여행하면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Everything is possible in India.” 이 말을 누가 해 주었는지 잊어버려서 어떤 맥락 속에서 이러한 말을 한 것인지 지금은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 두 가지 정도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 같다. 첫 번째는 인도의 값싼 물가로 인해 적은 돈으로도 많은 일이 가능하다는 것. 두 번째는 인도에서는 얼핏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알고 보면 가능하다는 것. 첫째 의미는 인도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체감할 수 있지만, 두 번째 의미를 깨닫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No Discount”라고 써 붙여 놓은 가게에 들어가서 당당하게 절반 가격으로 물건을 사서 나오는 친구들로부터 나는 그제야 무언가 깨달았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