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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로윈 Mar 06. 2019

내 생에 최악의 비행 경험

실패한 여행기 모음집 - 아에로플로트 탑승기

    흔히 한국 사람들은 성질이 급하다고 한다. 이 말이 어느 정도는 사실인 것 같다. 한국만큼 인터넷 속도가 빠른 곳은 드물고 음식점에서 메뉴가 서빙되는 속도도 한국이 눈에 띄게 빠르다. 그렇지만 ‘성질이 급하다’는 용어에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포함되어 있다. 성질이 급하다는 것은 마음에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는 뜻으로 들리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성질이 급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려 애썼다. 여행 중에는 특히 다양한 상황을 마주할 수 있고,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면 언제나 마음 속에 여유를 품고 있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특정 항공사를 비난하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아에로플로트’라는 러시아 항공사와의 경험을 통해서 나는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 뼛속까지 한국인인 나는 성질이 급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프라하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하게 되었던 내가 예매한 티켓은, 모스크바를 경유하여 프라하로 들어가는 아에로플로트 항공 비행기였다. 태풍으로 인해 경유지에 발이 묶였던 홍콩에서의 경험 이후 내 인생에서 더 이상 비행기로 인한 고생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큰 오산이었다.      



    아에로플로트라는 항공사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가장 싼 비행편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검색하면 유럽으로 통하는 가장 싼 항공사 중 하나로 아에로플로트가 나온다. 게다가, 나는 군 복무 시절 공군 부대에서 민항기의 비행 계획서를 보고 식별하는 보직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누군가가 ‘아에로플로트는 러시아의 국적기이다’라고 가르쳐주었던 기억이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대한항공이 우리나라 제1의 항공사인 것처럼, 아에로플로트는 러시아에서 제일이라고 생각했었나보다. 국적기라는 용어는 단지, 항공사가 소속된 국가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는 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당시의 나는, 러시아에서 가장 좋은 항공사를 이렇게 싼 가격이 탈 수 있으니 행운이라고 생각하며 즐겁게 항공권을 예매했었다. 제1의 항공사이니 서비스도 최상이겠지, 라고 주먹구구로 생각하면서 말이다.      




    비행 중 첫 번째 발생한 사고는 바로 엄청난 연착이었다. 원인은 눈이었다. 생각해보면 공군 출신인 내가 이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 신기하다. 비행기는 활주로에 눈이 쌓이면 미끄러워 이착륙하지 못한다. 그 때문에 공군 병사들은 겨울이 되면 때때로 활주로 눈을 치우는 일을 하기도 한다. 겨울에 모스크바에는 거의 항상 눈이 온다. 그 때문에 모스크바를 경유하는 아에로플로트 비행기는 쉽게 이착륙하지 못한다. 당연하다. 제시간에 도착하는 것이 오히려 이례적인 일인 것이다.      


    비행기는 모스크바에 가까이 가서 도시의 상공을 이리저리 떠돌았다. 비행기 좌석에 달린 화면에 비행경로가 마치 레이싱게임의 그것처럼 표시되는 것이 어이없었고 나중에는 허탈해서 웃음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공중을 떠돌고 떠돌다가 연료가 부족해서 모스크바가 아닌 다른 공항에 착륙한 뒤 주유하고 눈이 그치길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다린 뒤 모스크바에 도착하니 도착 예정시간보다 6시간이 지나 있었다. 활주로에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하자 비행기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일제히 손뼉을 쳤다. 무슨 대단한 일을 해낸 것 마냥. 내가 환승해야 할 비행기는 이미 떠난 지 오래였는데, 나는 이러다 국제미아가 되는 것 아닌가 하며 안절부절하고 있던 차에, 박수 소리는 불안한 내 마음만 더욱 두드릴 뿐이었다.      


비행기는 모스크바 상공을 이리저리 떠돌았다.


    망연자실한 채 안내 직원에게 어쩌면 좋은지 물어보았다. 나와 같이 마음이 급한 승객들이 길게 줄을 늘어섰지만, 직원은 한 명뿐이었다. 한참을 기다려 내 차례가 찾아오자 그녀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다른 비행기 티켓을 내밀었다. 그런데 맙소사. 그 비행기의 출발 예정시간은 40분 후였다. 일반적으로 출발 예정시간 30~40분부터 탑승을 시작하는데, 공항 직원은 바로 탑승해야 할 비행기 티켓을 준 것이다. 탑승 게이트가 안내 창구 바로 옆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겠지만, 모스크바의 공항은 정말이지 넓었다.     


    장시간의 비행으로 발은 퉁퉁 붓고 배는 너무도 고팠다. 가득 차서 무거운 배낭을 메고 냅다 게이트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20분쯤 쉬지 않고 뛰었을까, 게이트에 도착했을 때는 내가 거의 마지막 탑승객인 것 같았다. 게이트에 들어가서 비행기를 향해 이동하는 셔틀은 문이 열려 있었고 이미 다른 탑승객들은 셔틀 안에서 출발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탑승하자 셔틀 문이 닫혔지만, 셔틀은 출발하지 않았다. 아직 도착하지 못한 승객이 있는 것 같았다. 셔틀 기사가 승객이 모드 탑승할 때까지 기다려준다는 사실은 다행이었지만 내가 셔틀에 일어선 채로, 땀을 뻘뻘 흘리며 20kg에 달하는 배낭을 메고 있는 상황에서는 내심 셔틀이 그냥 출발해서 얼른 비행기에 탈 수 있길 바랄 뿐이었다.      


    그러다 셔틀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한국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나라 사람들만 이렇게 성질이 급한 것일까. 다른 사람들은 평온하게, 비행기가 출발해야 할 시간이 이미 지났는데도, 웃으며 대화하고 있었다. 마치 모스크바에서는 비행기가 항상 제시간에 출발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 30분쯤 더 기다렸을까, 마지막 승객들이 숨을 헐떡이며 셔틀에 탑승했다. 그제야 셔틀버스의 시동이 걸렸다. 탑승객들은 또 일제히 손뼉을 쳤다. 모스크바의 사람들은 (물론 모스크바에서 프라하로 가는 사람들이 모두 모스크바 사람들은 아니겠지만) 당연한 일에 손뼉 치며 감사하는 사람들이라고 나의 인상에 남아있다.      




    결국, 프라하까지 무사히 도착하기는 했다. ‘무사히’라는 말을 ‘목숨을 부지하고서’ 따위처럼 아주 넓은 의미로 사용한다면 말이다. 오후 9시에 도착하기로 한 비행기는 새벽 3시에 도착했다. 이 모든 우여곡절 끝에 도착을 하긴 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수하물을 찾으러 갔다. 그런데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는.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나의 케리어는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남은 짐이 하나도 없을 때까지 기다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한국인 승객 몇 명이 나와 같은 문제를 겪고 있었다. 새벽 3시에 안내 직원을 찾아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니, 아에로플로트에서 짐이 도착하지 않았단다. 살다 살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수하물이 도착하지 않았다니. 영화 「카모메 식당」에는 핀란드에서 언제 도착할 줄 모르는 수하물을 한없이 기다리는 할머니가 나오는데, 내가 바로 그 꼴 아닌가.      


    안내 직원에게 프라하의 숙소 주소를 적어 주고 수하물의 정보 등을 함께 적어서 준 뒤에야 공항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아주 긴 여행이었고, 프라하의 새벽공기는 차가웠다. 교환학생으로 가게 된 학교에서 나를 위해 배정해준 체코 학생 버디는 오후 8시부터 새벽 3시까지 공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나보다도 긴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수하물은 다음 날 기숙사에 무사히 도착했다.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비행기를 타면서 겪을 수 있는 수모를 종합 선물세트로 받은 것 같았다. 아, 교훈은 하나 있었다. 다시는 아에로플로트 항공사를 타지 않겠다는 것. (문제는 돌아오는 항공편을 이미 예매해 놓았던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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