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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로윈 Jan 03. 2019

하루 만 원으로 살아남는 법

실패한 여행기 모음집 – 인도(4)

    어렸을 적 ‘만 원의 행복’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연예인들이 일주일 동안 단돈 만 원으로 생활하는 도전을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성공한 연예인들도 많았지만, 당시 물가 수준을 감안하더라도 만 원으로 일주일을 산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며, 현실에서는 만 원으로는 하루를 살아가기도 쉽지 않다. 우선 연예인들은 일주일 분의 숙박비를 따로 낼 필요가 없이 본인의 집이 있었으며 냉장고를 뒤져서 요리를 해 먹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낯선 여행지에서는 숙박비며 물이며 생활에 필요한 것들에만 지출한다고 하더라도 쉴 새 없이 소비하게 된다. 그야말로 ‘움직이기만 해도 돈’이 든다는 말이 과장이 아닌 것이다.      


    300달러를 도둑맞은 이후 절약하며 여행하기는 했지만, 마음이 정말로 절박하지 않았던 것은, 체크카드에 비상금 20만 원이 있었고, 이를 다 쓰고 나더라도 가족으로부터 체크카드 송금을 받아서 ATM을 통해 인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나의 유일한 생명줄이었던 체크카드를 우다이푸르의 한 ATM에 꽂아두고 그대로 나와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이미 우다이푸르에서 야간 버스로 8시간도 넘게 걸리는 자이푸르에 도착한 후였다. 그때부터는 절약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였다. 체크카드가 없어진 나는 이제 남은 돈으로 남은 일정 동안 인도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남은 돈에서 도시 간 이동할 교통비를 제외한 금액을 남은 여행 일수로 나누니 하루에 1,000루피(한화 약 17,000원)가 되었다. 더 큰 문제는 자이푸르의 다음 행선지가 바로 타지마할의 도시 아그라였다는 것이다. 타지마할의 입장료가 1,000루피였기 때문에, 인도 여행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타지마할을 보기 위해서는 다른 도시에서 약 만 원만 쓸 수 있었다.  




자이푸르의 날씨는 정말 더웠다.

    

    현실을 직시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숙박할 곳을 정하는 일이었다. 숙박비는 항공권이나 쇼핑과 함께 여행비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주범인 데다, 일단 내버리고 나면 그만인 항공권이나 사지 않으면 되는 쇼핑과 달리 꼭 필요한 지출이라서 의미가 컸다. 아침 7시부터 땀을 뻘뻘 흘리며 큰 배낭을 메고 게스트하우스를 돌아다녔다. 자이푸르는 다른 여행지에 비해서 꽤 큰 도시였고, 소위 여행자 거리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서 게스트하우스와 게스트하우스를 이동할 때 한참을 걸어야 했다. 아침부터 고통의 행군을 한 끝에, 겨우 하루 350루피(한화 약 6,000원)짜리 방을 구했다. 싸구려 게스트하우스에 제대로 된 냉방 시설이 갖추어져 있을 리 없었다. 터무니없이 큰 소리를 내는 천정형 선풍기와 한여름에 따뜻한 물밖에 나오지 않는 수도꼭지, 그리고 집안 곳곳에서는 다리가 여섯(혹은 더 많이) 달린 작은 친구들이 갑자기 튀어나와 반갑게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겪어본 숙소 중 최악에 속하는 곳이었지만, 나는 싼값에 숙소를 구했다는 절반의 성공에 안도했다.


    그다음은 교통비였다. 인도에서는 대부분 이동할 때 ‘툭툭’을 이용한다. 툭툭의 핵심은 바로 흥정인데,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고 툭툭을 이용하다 보면 현지인 요금의 몇십 배나 되는 바가지를 쓸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당시 내게는 툭툭도 사치였기 때문에 애초부터 흥정의 여지가 없었다. 무계획 여행자였던 나에게 남는 것은 시간이고 없는 것은 돈이었기 때문에, 내가 선택한 교통수단은 바로 두 다리였다. 평소에 걷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고 몇 년 전에는 러닝 크루에서도 활동했던 나였기에 체력 하나는 자신 있었다. 자이푸르에서 보고 싶은 것을 몇 가지 정하고 모든 이동은 걸어서 가는 것으로 통일했다. 약 21km의 하프마라톤을 했던 경험을 기준으로 ‘편도 10km 이하의 거리는 무조건 걷는다’는 바보 같은 계산를 통해서 지도를 보니 얼추 다닐만한 것 같았다. 그렇게 의도치 않은 자이푸르 순례길이 시작되었다. 아침의 행군은 맛보기에 불과했다.     


넋 놓고 하와 마할을 바라보고 또 바라본 뒤에 시계를 보아도 시간은 별로 지나 있지 않았다.

    가장 보고 싶었던 건물인 ‘하와 마할’은 숙소에서 약 3km 떨어져 있었다. 하와 마할은 정말 아름다운 건물이었고 충분히 시간을 두고 감상하고 싶었기에 하와 마할이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서 100루피를 주고 아이스 커피를 시켰다. 그렇게 넋을 잃고 하와 마할의 아름다운 자태를 감상하고 또 감상하고. 그렇게 있다 보니 슬슬 카페 주인의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왜 내가 만났던 인도인들처럼 뻔뻔하지 못할까. 예의와 명분의 땅 동북아시아에서 온 가난한 여행자는 빈 커피잔을 오래 붙잡고 있지 못하고 카페를 나서야 했다. 이제 200루피 남았고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때 한 툭툭 기사가 길가에 차를 세우더니 어디까지 가냐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돈이 없기 때문에 어디든 걸어가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잃을 것은 없었다. 툭툭 기사 아저씨는 돈을 받지 않을 테니 일단 타보라고 했다. 나는 고맙다며 냉큼 툭툭에 앉아서 아저씨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 나는 정말 사기를 당하기 좋은 인간형이다. 지금까지 내가 멀쩡히 살아 숨 쉬는 것만 해도 기적이고 인류에 대한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할 결정적인 증거가 아닐까.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툭툭 기사 아저씨는 공짜로 투어를 시켜주겠다고 제안했다. 나의 사정이 딱하고 오늘(8월 15일)은 인도의 국경일이므로 아저씨 자신도 많이 일할 계획은 없었다며. 솔깃해서 툭툭을 탔는데, 아저씨는 정말로 돈을 한 푼도 받지 않고 공짜 시내 투어를 시켜주었다. 그 대신 나에게 코스 선택권은 없었다. 아저씨는 자이푸르에서 유명한 섬유와 가죽, 보석 등을 파는 큰 상가로 나를 데려가서, 구경하고 설명을 듣되, 실컷 구경한 후에 돈을 숙소에 놓고 왔다며 상가를 나오라며 나에게 귀띔해주었다. 나는 시키는 대로 했다. 그렇게 하니 공짜로 공예품 박물관 도슨트투어를 하고 나온 기분이었다. 다음으로는 향한 곳은 뒷골목의 작은 짜이 가게였다. 우리로 치면 택시 기사님들의 다방과 같은 곳이었는데, 아저씨는 나에게 10루피짜리 짜이 한 잔을 건네주었다. 다음은 힌두교 사원이었다. 실제로 8월 15일은 아주 큰 명절이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힌두교 사원을 찾아 일종의 절을 하고 얼굴에 물감으로 점을 찍었다. 핵심은 사원에서 공짜로 음식을 준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나라의 ‘절밥’과 같은 정체 모를 경단과 분홍색 ‘로즈밀크’를 받기 위해서 나는 정성을 가득 담아 힌두교 신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제단에 절을 했다.


나도 그 순간 만큼은 신실한 힌두교도였다.


    툭툭 기사라고 하면 흔히 바가지요금을 씌워 여행자들을 속이는 존재라고 인식해 왔는데, 그날 이후로 이러한 선입견이 완전히 바뀌었다. 물론 나에게 선행을 베풀었던 툭툭 기사는 그 아저씨 한 분이셨지만, 특정 직업군에 속한 사람이라고 무조건 선입견을 품고 미워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아저씨 덕분에 알찬 자이푸르 첫째 날의 일정을 무사히 마쳤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어떻게든 은혜를 갚겠다고 아저씨의 핸드폰 번호와 이름을 적어 왔는데, 받아적는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던지 나중에 찾아보니 잘못된 번호라고 나왔다.      



   

문제의 220루피짜리 음료

     다음 날에는 10루피짜리 땅콩과 하나 5루피짜리 바나나를 몇 개 사서 끼니를 해결하고 역시 종일 걷기만 했다. 더워서 숙소에서 쉴 수도 없었다. 자이푸르의 하이라이트는 호수에 떠 있는 성인 ‘잘 마할’이었는데, 그 성이 대단한 건물이어서가 아니라 그 건물을 보기 위해 하루 동안 걸었던 걸이가 약 25km였기 때문이다. 40도가 넘는 더위 속에 땅콩과 바나나와 생수만 들고 극한의 행군을 하고 나서는 도저히 더위를 참을 수 없어 길가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유일하게 시킬 수 있는 찬 음료는 220루피짜리였다. 별수 없이 시킨, 인도에서 마셨던 가장 비싼 음료를 마시던 나는, 잘 마할까지 툭툭을 타고 다녀왔으면 200루피도 나오지 않았을 텐데, 라는 생각을 그제야 하며 허탈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삼복더위에 침대 위에 벌레들을 피해 침낭을 설치하고 누웠다. 처음에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 너무 더워서 나중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침낭 속에 있게 되었다. 25km를 걸었던 나의 몸에서는 한밤중이 되었는데도 열기가 가시지 않았다. 천장에 선풍기는 만들어내는 바람에 비해 지나치게 큰 소리를 주기적으로 냈다. 오만 생각이 머릿속에 들기 시작했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왜 무더운 한국을 피해 도망온 나라가 하필 인도란 말인가. 게다가 현실에서 도피해 온 이곳에서 왜 나는 땅콩과 바나나를 씹어 먹고 물배를 채우고 있나. 가족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런 식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새벽 세 시가 넘어갈 때까지 잠은 올 기색도 없었다. 천장의 선풍기가 떨어져서 내가 그대로 사망해버리면 어쩌나 생각할 때쯤에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침낭 속에서 발가벗고 울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우스워 갑자기 웃음이 났다. 그렇게 새벽 세 시에 텅 빈 더블룸 침대 위 침낭에서 나는 미친 사람처럼 발가벗고 울다가 웃는 짓을 반복했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다음 도시인 아그라에서 바로 델리로 가면 되지 않을까? 아그라에서 바라나시로 기차를 타고 가서 바라나시에서 오래 머물다가 델리로 돌아가서 비행기를 타는 것이 원래의 여행 계획이었다. 갠지스강이 흐르는 바라나시의 가트에 앉아 있으면 삶과 죽음의 의미라던가, 그동안 목표로 삼고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치들의 허무함을 느끼고 진리를 깨달은 철학자처럼 한국으로 돌아갈 수만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힘든 생활을 계속할 바에 삶과 죽음의 의미 따위가 무슨 상관인가. 아껴야 살고 아끼지 못하면 죽는 상황에서, 강변의 사색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아그라에서 가까운 델리로 돌아가면 한국인 주인분이 운영하시는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그 주인께 부탁해서 송금을 받아보자. 그렇게 발가벗은 미친 남자는 밤을 꼴딱 새우며 생각을 하다가 현실적인 해결책을 세우게 되었다. 내일, 아그라로 갔다가 델리로 돌아간다. 가족에게 부탁해서 돈을 빌린다. 그리고는 무엇을 할지 생각하자. 그제야 잠이 쏟아졌다. 사라질 기미도 보이지 않던 열기가 조금씩 가셨다.     


    그렇게 나의 하루 만 원으로 살아남기 도전은 며칠 만에 허무하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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