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애설을 이유로 팬이 연예인을 비난한다. 정당한 비난일까? 그렇다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그(녀)에 대한 비난은 어떨까. 본질적으로 두 관계는 차이가 없다. 후자가 사람 세 명과 엇갈린 화살표 두 개로 이루어진 그림으로 도식화된다면 전자는 연예인이라는 한 사람을 중심으로 같은 그림을 수천만 번 중첩시킨 것뿐이다. 따라서 나를 사랑하지 않음이 한 사람에 대한 비난의 이유가 될 수 없다면 그 사람이 공인이라도 이 명제의 진리값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랑하다'라는 동사는 주체와 대상 즉, 두 개의 요소 이외에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주어와 목적어 이외에 다른 요소의 자리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사랑이라고 흔히들 말하는 것, 이를테면 사랑의 이데아가 만약 존재한다면, 그것은 두 사람을 이외에는 아무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간단한 그림이 될 것이다. 따라서 사랑에 제3자 혹은 제3의 요소가 개입될 경우 그것은 왜곡된 사랑일 수밖에 없다. '나는 이러이러한 이유로 너를 사랑해'라는 말은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사랑의 이유(조건)가 없어지면 사랑도 사라질 것이라는 불안정한 감정상태의 표현이다. 물론 상대방도 나를 사랑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것 역시 부가적인 조건일 뿐이다. 이 역시 왜곡된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데, '너’ 그 자체가 아닌, '나를 사랑하는 너'에 대한 사랑 이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도 사랑하지 않겠다는 조건부 사랑인 셈이다. 조건부 사랑의 극단은 사디즘이다. 나는 이러이러한 너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이러이러하게 만들고자 함은 상대에 대한 폭력이다. 이런 사랑은, 상대를 내 맘대로 움직이는, 그야말로 밀랍인형으로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오늘밤 너는 너무 완벽해 보여 / 너무 행복해 보여 너무 / 오늘밤 내게 안겨 웃어봐 / 내게 안겨 춤춰봐 내게 안겨’(자우림 - 밀랍천사)
팬덤은 어쩌면 이처럼 왜곡된 사랑의 집합들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팬들은 스타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스크린에 비친 스타의 모습은 원본도 없는 복제, 즉 시뮬라크르일 뿐이다. 아이돌(idol)은, 적어도 사랑에 관해서는 그것의 어원과는 달리 전혀 이상적(ideal)이지 않다. 팬들은 각자의 스크린에 비친 스타를 보면서 저마다의 밀랍천사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밀랍천사가 스스로 말을 하고, 내 말을 듣지 않았을 때, 팬의 마음에 찾아오는 것은 실망과 놀라움 그리고 주인을 거역한 밀랍천사에 대한 배신감이다. 그리고, 그 배신감은 폭력으로 표현된다. 주인을 거역한 배신자, 밀랍천사는 충분히 비난과 처벌을 받을 만 하다. 그러나 '사랑하다'라는 문장에 필요한 주어와 목적어는 결코 그렇지 않다. 진정한 사랑이라면 사랑의 대상을 '대상화’(객체화)시켜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우려되는 점은, 수많은 팬들이 정말로 한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그 사람의 주인이 되려 하지는 않을까 하는 점이다. 대상의 주체성을 존중해 주는 것이 이상적인(ideal) 사랑이지 않을까. 굳이 비난의 화살이 한 곳을 향해야 한다면, 한 사람을 객체화시킨 자본주의와 매스미디어의 메커니즘이 그 표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총에 맞은 새와 그것을 박제해서 속에 품는 어린아이에게 무슨 잘못이 있으랴? 총은 사냥꾼이 쏘았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