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을 앞둔 딸의 아버지를 위한 1년간의 저녁 식탁 차리기
Prologue
엄마는 모든 것을 해주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엄마의 모든 순간은 남을 위해 쓰였다.
눈을 뜨는 순간 물밀듯이 밀려오는 과업.
세탁기를 돌리고 청소한 후, 장을 봐 와 미리 저녁 식사를 준비하면 드디어 집을 나설 수 있다.
손에는 점심 도시락을 들고 그리 가볍지 않은 발걸음으로.
아빠와 함께 운영하는 택배 사무실로 출근을 하면, 그녀 하루의 제2막이 시작된다. 제2막은 너무도 길다. 시침이 가리키는 곳이 집을 나설 때와 같은 곳이다.
아빠와 퇴근해 집에 같이 오면 엄마는 늦은 저녁을 준비한다. 마지막 과업인 셈이다.
아무래도 엄마는 잊은듯하였다. 자기도 쉼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가족 모두의 삶을 품고 살아내기 위해 자기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 슈퍼우먼이라 착각한듯하였다.
나는 엄마의 망각과 착각을 모른 척 한 나쁜 년.
이렇게 기억을 더듬기에도 염치가 없는 나란 년은 엄마가 떠나고서야 저녁 준비를 한다.
한 번도 저녁 식사 준비를 거른 적도, 바턴을 넘긴 적도 없는 엄마와 그 덕에 식사 해결이라는 생활 영위에 가장 기본적인 것에 취약해진 아빠. 나는 그런 아빠가 밉기도 참 미웠다. 그리고 이제는 떠나려 한다.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위해 가족 품을 떠나 낯선 곳에 새 터전을 마련할 것이다.
32년 동안 우리는 많은 일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나는 사랑 위에 미움과 원망, 애틋함과 안타까움이라는 복잡한 감정의 타래를 만들어냈다.
부디 그 타래가 이별 식탁 위에서 서서히 풀어지길 바란다.
당신과 나의 첫 번째 이별 식탁
푸른 어둠이 내리깔리고 그 아래 비가 쏟아지는 날.
이직한 직장으로의 출근이 일주일 남은 백수는 날씨에 취해 분위기에 취해 요리에 대한 의욕을 잃었다.
되도록 손이 덜 가는 음식을 하고 싶어 냉장고 문을 열었다. 사다 둔 어묵이 부디 자기를 요리해 달라며 앞칸에서 축 늘어져 나를 본다. 어쩔 수 없지 오늘은 너로 정했다!
어묵탕의 동료로 누가 좋을까. 오징어볶음이나 김밥이 좋겠지만 할 엄두가 나지 않고 파스타 재료로 사다둔 베이컨이 보인다. 아무래도 오늘은 볶음밥을 해야겠다.
마늘과 파로 기름을 내고 베이컨과 양파를 썰어서 밥과 볶아냈다. 그런데 뭔가 허전하고 아쉽다.
덮어주는 이가 없어서일까. 오믈렛은 해본 적이 없어 걱정스럽지만 그래도 이 허전해 보이는 볶음밥을 위해 도전하기로 했다.
분명 손이 덜 가는 음식을 하려 했지만 일이 커졌다. 요리는 마치 인생 같구나. 난 늘 일을 벌이고 싶지 않았지만 내 인생은 우당탕탕 32년간 굴러왔지. 어쩌면 그 간극 때문에 괴로웠는지도 모르겠다.
만들어진 달걀지단을 보는 이 마음도 참 괴롭다. 내가 하는 요리는 맛은 나쁘지 않지만 늘 비주얼이 아쉽다. 숟가락이 절로 가지는 않는달까. 너덜너덜한 달걀을 보니 이내 시무룩해진다.
민망함에, 좋아하는 국수 맛집에서 밑반찬으로 준 열무김치를 꺼냈다.
맛이 보증된 이 열무김치라도 있어야 이 식탁이 살 것 같았다.
다행히 아빠는 식사를 아주 오래도록 했다. 대학가 식당이라면 10분 컷으로 끝날 메뉴가 30분은 넘게 걸렸다.
아빠는 입맛에 별로 맞지 않으면 더 이상 음미하고 싶지 않은 지, 식사를 빨리 끝내는 경향이 있다.
'프로 음미가'랄까. 프로 음미가의 식사 시간이 딱 그날 요리의 점수인 셈이다.
역시 나야. 비주얼 좀 망치면 어때 맛있으면 그만이지.
아까까지만 해도 망쳐버린 달걀 때문에 내 인생 같다고 한탄하던 여자는 없다.
나는 참 이다지도 가벼운 인간.
지금은 웃으며 말하지만 한동안 나는 인생을 망쳐버렸다는 생각에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때 필요했던 것은 가까운 사람들의 인정이었다.
"그럴 수 있어. 너 지금 이렇게 방황하는 거 당연한 거야. 슬퍼하는 것도 얼마나 힘든 건데. 앞으로 잘하면 되지."
이런 류의 너무 뻔해서 재미없기까지 한 인정. 이게 전부였다.
그러나 그런 인정이 생각보다 쉬운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빠는 날 비난했다.
"네 사업이 망해버린 것은 너와 나의 수치이며, 네가 이렇게 구는 것도 다 정신을 못 차려서 그런 것이다. 세상에 널 도와줄 이는 아무도 없다. 정신 차리고 어서 걸어라. 너는 아직도 부족하다."
각성을 위한 쓴소리였을 것이다. 힘들어하고 있고, 헤매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지나간다던 나의 시간은 멈춰 있었고, 좌절은 내 두 귀를 막았다.
느껴지는 것은 나를 향한 당신의 정서였다. 당신의 메시지에 깔린 생각이었다. 무시와 환멸, 비하와 염증.
나를 향한 당신의 감정인지 내게 꽂는 나의 말인지 시간이 갈수록 나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정말 나사 열댓 개 정도는 빠져버린 새끼인 것일까. 나를 지탱하던 모든 상식과 신념은 쓸모없는 쓰레기였던 것일까. 물음표의 바다에서 유영하며 밤을 지새웠다.
내게 필요했던 것은 단 하나의 인정이었다. 정신병자가 아니구나. 힘들만하구나. 그 인정으로 방황의 칼날 위에 아슬아슬 서 있는 날 확인하고, 그곳에서 내려와 불안을 떨치고 싶었다.
갈 길을 찾고 싶었던 나의 간절함을 들었던 사람들이 물음표의 바다에 잠식하는 나를 건져 올렸다.
그리고 다시 길 위에 섰고, 천천히 내딛고, 걸었다. 그 길을 한참 걷고 나서야 당신은 나를 바로 보았다. 내 주변을 둘러싼 많은 못된 것들을 확인해주었다. 이렇게 못생긴 오믈렛도 의심하지 않고 바로 수저에 뜰 수 있는 사람이면, 나도 좀 빨리 인정해주지. 내 잘못만은 아니었다고.
한편으론 그렇게 모든 것을 안아주기에는 당신도 벅찼던 것이었을까 생각한다. 우린 모두 허락된 크기의 그릇에 찰랑이는 수고를 지고 사는 존재들이니까.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