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을 앞둔 딸의 아버지를 위한 저녁 식탁 차리기
산 넘고 물 넘어 있는 도서관이 내 첫 직장이었다. 한적한 시골 동네였던 그곳에는 식당이 몇 개 되지 않았다. 그 수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인 식당들 중에서 제육볶음, 만둣국, 돈가스, 칼국수 등 갖가지 분식류를 팔던 식당이 있었다. 이름마저 정겨운 '맛나 분식'. 내 인생에서 가장 함박스테이크를 자주 먹었던 때가 그때, 그곳 맛나 분식에서였다. 분식집 함박스테이크였지만 소담스럽게 담아 계란 프라이와 함께 나오는 그 메뉴는 이상하게도 정이 가는 시골의 맛이 있었다. 실제 사장님은 평범한 중년의 여인이었지만, 여름방학을 맞아 시골집으로 내려온 손주들을 위해 낯선 음식을 내온 할머니의 맛이 있었다.
당신과 나의 다섯 번째 이별 식탁
대기업에서 나온 제품으로 조리한 함박스테이크라서 따로 레시피는 없지만, 전자레인지로 해동시킨 후
프라이팬에 구워주면 노릇노릇 살아있는 육즙으로 더욱 맛있게 즐길 수 있다.
냉동식품이지만 함박스테이크 전문 식당에서 먹는 것과 육즙도, 고기도, 도톰한 정도도 겨룰만하다.
더운 여름날, 에어컨 대신 선풍기를 틀어주던 맛나 분식에서의 기억. 시골 할머니 집이 그렇듯, 맛나 분식도 선풍기만으로 더위를 잠시 잊을 수 있었다. 맛나 분식과 내 첫 직장이 있던 그 동네는 아빠가 택배 배달을 하는 곳이기도 했다. 첫 한 달 동안 출퇴근을 시켜주던 아빠는, 당신의 퇴근 후 다시 나를 데리러 와야 하는 날이 많아지자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시켜주었다. 원할 때마다 운전해주던 베테랑 기사가 은퇴 의사를 밝힌 것이다.
운전면허를 취득하고, 경차 한 대를 뽑았다. 차를 사기엔 어렸던 나는 천만 원이 넘는 비싼 값 치르기를 꺼려했고, 아빠는 당신이 보험료까지 다 책임져주겠다고 공언하며 멋지게 차를 선물해주었다.
처음 차를 운전한 일주일은 끔찍하게 무서웠다. 그곳은 산속 마을, 언제 어디서 고라니가 튀어나올지 모르며, 운 나쁘게 경운기 뒤에서 운전하게 되는 날엔 터지는 속을 부여잡고 거북이 운전을 해야 했다. 걷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던, 시골을 닮은 느린 운전 길.
일주일, 한 달, 두 달이 지나고 운전에 익숙해졌을 때 즈음, 차에 들어가는 모든 경비를 대주겠다고 했던 아빠는 첫 할부금을 내 준 뒤로, 납기일이 도래할 때마다 말을 바꾸었다. '우선 네가 먼저 내 봐라', '이번 달에 네가 너무 생활비를 많이 썼다', '내가 돈이 어디 있냐' 그렇게 할부금은 자연스럽게 내 몫이 되었다. 영악한 양반.
카푸어의 삶은 고됐지만, 가난뱅이의 퇴근길은 더욱 신이 난다. 수고스러운 현실 탈출의 기분을 잠시나마 느끼는 순간이랄까. 쿵쾅쿵쾅 쿵쾅 뚜루루루루 귓전을 내리 찧는 음악에 핸들 위 손가락을 까딱이며 산속 마을을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끼익! 골목길에서 순식간에 튀어나와 끼어든 차 때문에 브레이크를 세게 밟았다. 심장이 콩콩. 약한 세기로 빠르게 뛰었다. 뵈는 것 없이 욕을 내뱉었다. 몇 마디 거친 말들을 더 지르고 차츰 진정이 될 무렵, 끼어든 앞 차의 번호판이 눈에 들어왔다. 화가 나서 눈에 뵈는 게 없던 순간이 지나고 주의력이 돌아오자 차종과 번호가 다시 한번 충격을 안겼다. 저것은 나의 베테랑 운전기사 성식 씨의 차가 아닌가. 흥분해서 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어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그날따라 길게 느껴졌다. 마음이 드릉드릉 설레고 입가는 옴짝달싹 배시시 저절로 윗니가 드러났다.
"여보세요"
"어이 신 씨!! 누가 운전을 그렇게 하래 응?! 너무 매너가 없잖아! 거 운전 좀 똑바로 합시다! 깜빡이는 좀 켜고!"
말을 잃은 아빠는 백미러로 날 확인했는지, "너냐?" 묻고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내 작은 차는 터져 나오는 웃음으로 날아갈 것 같았다. 내 얼굴에 피어나는 환희. 입가에 환하게 드리운 행복.
약간의 창피와, 민망함을 준 것으로 할부금 사기 사건에 대한 앙갚음을 한 것이다.
내돈 내산 내차. 내 돈 주고 내가 산 내 차 조수석에 앉을 때마다 그는 얼마나 많은 잔소리를 했었던가.
'그런 자세로 운전하면 허리가 나간다. 옆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운전이다. 너무 밟지 말아라.'
나는 이게 얼마나 꼬숩고 재밌는 일이었는지, 그 해 명절 친척집에서도 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옹졸한 면이 있는 나란 인간은 아직도 이 이야기를 하며 함박 웃을 수 있다. 함박스테이크를 봐도 그 동네의 향수를 떠올리다가 결국 종착지는 그 사건으로 흐르게 된다. 아빠가 도서관에 일부러 들려서라도 초콜릿 간식을 사주기도 했었는데, 그런 기억은 잘하지도 않으면서 떠올릴 때마다 키득 키득대곤 하는 이 사건이 아직도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