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을 앞둔 달의 아버지를 위한 저녁 식탁 차리기
비 내리는 일요일 오후. 안에서 보는 바깥 풍경이 꽤 낭만적이다. 그 속으로 뛰어든다면 넝마에 가까운 꼴이 되겠지만. 뭐든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평온하고 감상적일 수 있는 것이다.
윤하의 빗소리를 흥얼거리며 날씨와 내 기분에 어울릴 요리를 준비했다. 부엌에선 빗소리가, 아빠의 작은 성에선 BTS의 FAKE LOVE가 흘러나왔다. 고개가 갸우뚱. 어울리지 않는 음악이 조금 이상 했지만, 괜찮다. 아빠를 위한 저녁 식사로 둔갑한, 몽글한 내 마음이 만족할 요리를 시작했으니까. 토마토 비빔국수와 감자전 재료가 상 위에 올랐다. 내리는 비와 국수에 빠질 수 없는 어묵 탕은 덤이다. SNS에 여름 별미, 토마토 비빔국수가 자주 게시되는 것을 보고 언젠간 꼭 해보고 말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이 오늘이다.
피자의 파인애플도 싫은데 비빔국수에 토마토가 웬 말일까.
나는 이게 꼭 맛있을 것 같았다. 그 강렬한 예감에 사로잡혀 면을 삶고 채소를 사각사각 손질했다.
당신과 나의 네 번째 이별 식탁
토마토 비빔국수 재료 (2인분 기준)
토마토(1/2개), 오이(원하는 만큼), 각종 채소(나는 애호박과 당근), 달걀, 소면
양념장: 설탕(1), 토마토소스(1/2컵), 고추장(2), 간장(1), 식초(1), 참기름(2), 다진 마늘(0.3), 깨소금(1)
만드는 법
달걀은 7분~12분 정도 원하는 만큼 삶아 찬물에 담근 후 껍질을 벗긴다.
채소를 손질하고, 달걀을 반으로 가른다.
끓는 물에 소면을 넣어 3분간 삶고, 체에 바쳐 물기를 제거한다.
양념장 재료를 섞는다. 토마토는 반 개 정도 믹서에 갈거나, 한식 토마토 고추장을 써도 무방하다.
우리 동네 마트에는 한식 토마토소스가 없고, 믹서 설거지도 싫어서 토마토 스파게티 소스로 대체했다.
맛있으리라 기대는 했지만, 아빠가 먼저 맛있게 먹기를 기다렸다. 내 장유유서는 조금 얍삽하다.
토마토 비빔국수의 정체를 모른 채 식사를 시작한 아빠. 내 눈은 그를 주시했지만, 사로잡힌 것은 눈이 아닌 귀였다. 아빠의 젓가락 소리가 BTS의 FAKE LOVE와 닮아갔다. 젓가락이 내는 소리치고는 조금 열정적이었다. 그렇지만 오늘도 싹 비어진 그릇.
오늘의 장유유서 셰프가 드디어 FAKE LOVE의 비밀을 알고 싶어 한 젓가락 들었다. 그리고 외쳤다.
와, 너무 맛있어. 토마토를 넣자 간장의 쓴 맛이 부드럽고 상큼해졌다. 혼자 새큼한 맛으로 튈 것 같았던 토마토가 중화를 해주다니. 이렇게 토마토의 새로운 면모를 알아간다. 그동안 너에 대해 깊은 오해가 있었구나.
나는 너를 몰랐다.
"아빠, BTS 좋아해?"
토마토 비빔국수가 정말 맛있었는지 보다 더 궁금한 이야기였다.
왜 그의 방에서 주말 내내 BTS 노래가 흘러나오는지 알아야 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입술이 잔뜩 얇아진 아빠는,
"그래! 난 좋아하면 안 되냐"
멋쩍어 새침하게 말하는, 네 살 손녀를 둔 육십삼 세.
차라리 걸그룹이었다면 웃진 않았을 텐데, 환갑이 넘은 아저씨가 보이그룹을 좋아한다는 것이 무미건조한 일은 아니었다. 그의 작은 성, 아빠 방 문을 닫고 깔깔대고 웃었다. 앞에 없는 아빠를 놀리는 기분이었다.
30년을 같이 살면서 어느 연예인 좋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그 처음이 BTS라니. 뭐, 매력 넘치는 아이돌이니 그럴 수 있겠다. 그 매력이 꼭 어린 여자들한테만 통하는 것은 아니니까.
이렇게 아빠의 새로운 면모를 알아간다. 나는 아빠를 몰랐다.
아빠도 나를 모른다.
가끔 내게 "그렇게 물러 터져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하니" 라며 잔소리를 할 때가 있다.
이런 말을 들으면 할 말이 없어 조개처럼 쏙 입을 다물게 된다. 아빠의 이 말이 내 친구들 사이에서는 큰 웃음을 준다는 사실을, 아빠는 모를 것이다. 어렸을 적에는 쑥스러움이 많아,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 할 때가 많았다. 무려 30년 가까이 된 이야기이다.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는 동안 어린 보라가 얼마나 거친 모습으로 변화했는 지 아빠는 모른다. 여전히 30년 전 시간에 머물러서 나를 보는 아빠는, 지금의 나를 모른다.
우리가 서로를 완전히 알 수 있을 때는 아마 오지 않을 것이다.
완전히라는 말은 사람한테 존재할 수 없으니까.
그저 적당히 아는 사이로 지내면서, 가끔은 새로움에 충격받기도, 익숙함에 질려하기도, 때론 오늘처럼 재밌어하면서 살게 되겠지. 우리 사이엔 부풀어 오르는 행복보다, 적당히 불어주는 잔잔한 바람이 필요하다.
마음에 어떤 긴장감 없이, 메스껍게 하는 불안함 없이, 안일하게 지내기를.
빗소리에 기대어 사소한 평화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