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보라 Mar 06. 2022

당신과 나의 이별 식탁 : 생일상

헤어지지 못하는 여자, 떠나가지 못하는 남자

오늘의 저녁식사



마지막 이별 식탁을 차리고 10개월이 지났다. 작년 여름부터는 행정실 퇴근 후, 저녁 시간에 영어 과외와 외주 원고 작업을 하면서 자연스레 식사는 각자도생이 되었다. 처음 며칠은 직분을 다하지 못했다는 부채감과 미안함 때문에 괜히 아빠 얼굴을 보는 것이 어색했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아빠 또한 담담히 상황에 적응하며 이별 식탁은 자연스럽게 우리 사이에 잊혔다.

늘 곤궁했던 내가 왜 그제야 결심이 섰는지는 모르겠지만, 하필 그 시기에 일을 늘렸고, 변화하는 상황에 추후 거주지에 대한 아빠의 의견도 바뀌었다. 거주 형태에 대해 어떠한 바람도 계획도, 의지하는 구석도 없는 내게 혼자 살 준비를 하라며 속을 뒤집어 놓던 아빠는 내가 LH 전세자금지원을 신청하자 말을 달리했다.


'그거 되면, 집 구해서 나가서 우리 둘이 살면 되겠구나.'


너무나 산뜻하게 말해서 전에는 다른 말을 했었다는 것을 하마터면 기억하지 못할 뻔했다.

그리고 몇 개월 뒤, 기대도 안 하고 있던 LH 전세자금지원에 당첨됐다. 당첨 확인 문자를 받고 뛸 듯이 기뻤던 그날의, 그 순간의 기억은 아직도 몽글몽글 비눗방울이 되어 내 살결에 와닿는다. 누군가와 눈물까지 보이며 크게 싸운 그날. 앞에 있는 상대방. 핸드폰 문자 알림음. 꾹꾹 눌러 담던 감정. 그리고 차를 타고 혼자가 되었을 때, 입가부터 번지며 눈물을 지워낸 미소.


노후 계획 변경과 일련의 이유들로 아빠는 지금 나와 함께 있다. LH의 도움으로 내가 마련해서 나온 이 집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다음날까지 삭신이 쑤실 정도로 고생하며 이사한 지 2개월이 지나고 아빠의 65번째 생일이 되었다. 여전히 밤늦게까지 일하느라 식사는 각자도생이 되었지만, 오늘만큼은 특별히 그를 위한 생일상을 차려보았다.


  


오늘의 이별 식탁


생일상차림


생일상 메뉴 : 소고기 미역국, 소시지부침, 잡채, 잡곡밥, 밑반찬 3종 세트 (어묵볶음, 오징어젓갈, 마카로니 샐러드), 딸기 생크림 케이크



오래간만에 상을 차리다 보니, 장을 봐오면서 중요한 재료를 빼먹었다. 집에도, 장바구니에도 국간장이 없었다. 그래, 국간장이 없으면 약간의 간장과 소금 맛으로 간을 내자. 어차피 아빠, 조리과정은 모르니까. 하하하하 어색하게 스스로를 위안하며 미역을 물에 불렸다. 그리고 불린 미역을 소고기 끓는 물에 그대로 투하.

뭔가 이상한 것을 느낀 것은 이미 미역국이 끓기 시작한 지 10분이나 더 지나서였다. 나는 미역을 볶지 않았다. 나 자신, 요리 초보가 된 기분이다. 어찌하여 이런 실수를. 생일 미역국이라 더 정성을 들이고 싶었는데, 그 마음이 미역국에 담길 리가 없었다. 긴급처방이 될까 하여 들기름을 조금 넣고 푹 끓였다. 애끓는 마음 그대로 미역국을 푹 푹 끓여냈다. 다행히 맛이 좋았다. 몇 가지 빼먹어도 맛이 좋은, 참 착한 녀석 미역국에게 고마웠다. 퇴근한 아빠는 밥상을 보고도 그냥 지나쳐갔다.


'아빠, 씻고 나와서 밥 먹어. 이거 생일상이야.'


굳이 소개를 듣고서야 밥상을 확인한 아빠는 뽀송하게 목욕재계를 마친 후 식탁에 앉았다.

후루루룩 촵촵. 3개월 만에 이 집 식탁에서 밥 먹는 소리를 들었다. 쩝쩝대는 소리를 유난히 싫어하지만, 오늘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소리가 나지 않았더라면 서운하지 않았을까.

아빠는 큰 그릇에 담긴 국과 밥, 반찬까지 다 비웠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며


'잘 먹었다.'


호쾌하게 외치고 자신의 성으로 돌아갔다. 언제 저런 표현을 한 적이 있던가. 낯선 단어가 귀에 와 부딪쳤다.

맛이 좋다, 나쁘다 평가는 스스럼없이 하던 아빠였다. 잘 먹었다는 평범한 표현이라고는 모르는 이상한 나라의 무뚝뚝한 사람. 그런 아빠가 한 별거 없는 잘 먹었다는 말에는 참 별게 있었다.

 옛날 그대로, 밥그릇 그대로 식탁에 남겨두고 가는 쿨함도 밉지 않았고, 뽀드득뽀드득 설거지 소리도 나쁘지 않았다. 별걸 품고 있는 별거 아닌 , 하루를, 또 순간을 채색한다.


별거 없을 것 같았던 우리의 이별 식탁도 자연스레 사라졌다가 함께 하는 식탁이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별거 없이 막을 내릴 것 같았던 아빠와 나의 관계도 식탁을 준비하고 잘 먹어주는 시간 속에서 많이 변했다. 코 앞에 이별을 준비하던 우리는 미움과 원망을 내려놓고 유예된 이별 앞으로 편안히 내딛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