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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illness Dec 29. 2020

바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부제 : 아무 말

사실은 사실이라 말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한 해 동안 적었던 모든 글들을 훑어보며 든 생각이다. 내리쬐는 방콕의 강한 햇살, 아니면 바라나시의 뿌연 먼지, 그것도 아니면 사파호를 둘러싼 야릇한 물안개 때문인지 내 모든 기억은 빛에 바래고 불투명한 것들에 갇혀 희미해져 가고 있다. 그래서 그것들은 내가 몸소 겪었지만, 사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환상으로 남았다.


지금 와서 기억에 남는 것을 자면, 거리를 빼곡히 메웠던 불가해한 냄새들의 작은 조각과 시작이 너무나 밝아서 바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뿐이다. 별 의미도 없는 기체 입자들이야 알량한 추억을 만드는 것 외에는 말 그대로 별 의미도 없는 것이라 접어두고, 지금부터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우주의 팽창 속도와 맘먹게 늘어나고 무언가에 가려져서 희미해져 버리는, 또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 대해.




세상 그 무엇보다 성기게 시작된 그들과의 만남은 '시작과 끝은 하나다'라는 결코 믿기 싫은 문장처럼 그 사이가 드문드문한 채로 끝이 났다. 그런 그들을 뭐하러 그리냐는 아무개의 말에는 당연히 미련 때문이지라며 너스레를 떨어댔다. 호기롭게 뱉어 놓고서도, 내심 미련이라는 왜인지 불경스러운 단어가 마음에 걸려서 몇 달 며칠을 앓았던 기억이 난다. 물론 사전을 아무리 뒤져도 미련을 대체할 마땅한 단어는 찾을 수 없었다.


미련이야말로 나를 살아 숨 쉬게 하는 유일한 원동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일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에는 스스로에게 개탄하며 차라리 나 자신마저 부정하고야 마는 니힐리즘적 경지에 오르기도 했다. 물론 그 허무한 허무주의는 귀여운 우리 집 개를 어루만지며, '적어도 우리 집 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참 좋다'라는 절대적 진리를 찾아냄과 동시에 허무하게 사라졌만 말이다.


그래서 지금은 '꽤 많은 것들이 미련 탓이다' 생각하며 태연하게 궁상을 떨며 지낸다. 내가 잠결에 그들을 그리는 것도, 자의 반 타의 반 꺼진 줄 알았던 여행의 불씨가 큰 산불이 되어 돌아온 것도 모두 미련의 탓이라고.




오늘 새벽 잠이 들기 직전에는 나의 첫 번째 인도 사람 친구 비벡이 떠올랐다. 그는 은행원이면서 곧 죽어도 자신의 직업은 글쟁이라며 핏대를 세우곤 했다. 그가 창구에 앉아 있는 모습을 수차례 마주한 나는 인도인 특유의 허풍을 가소롭게 여기며, 네가 정말 그럴싸한 작가면 나는 타고르라고 그를 놀려댔다. 하지만 그가 기세등등하게 가방에서 꺼내 든 책 한 권을 보고 나는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두툼한 손에 들린 흐릿한 책이 바로 표지가 마음에 들어 몇 권이나 구매한 나의 첫 인도 책, 'BIRDSONGS OF LOVE & DESPAIR' 였기 때문이다.


내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문장 몇 줄과 그 문장들을 습관처럼 되뇌며 너스레를 떨던 그의 모습이 희미한 유리창에 비친 바라나시의 모습처럼 나에게 찾아왔다. 내가 공들여 찍어준 그의 사진이 책 어디에도 없던 것은 꽤나 서운한 일이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는 쉼 없이 달리던 나를 멈춰준 첫 번째 사람인데, 우왕좌왕 헤매며 골목길을 오가는 나를 내가 마땅히 있어야 하는 곳으로 돌려보내 준 사람인데.


하지만 진정으로 안타깝고 서운한 점은 그 역시 내 기억 속에서 적당히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오가던 DM(주로 훌륭한 작가들을 깎아내리고 자신을 높이 추켜세웠다)이 점차 줄어들었고, 그러다 이제는 그의 목소리를 도무지 떠올릴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바라나시는 따가운 햇볕이 절대 바닥까지 도달할 수 없는 도시니까 아마도 희뿌연 미세먼지 때문이겠지. 


얼마 후면 나는 그의 책을 손에 쥐거나, SNS에 접속하지 않고서는 그의 이름을 떠올릴 수 없을 것이다. 또 얼마 후면 그를 바라나시에서 만났던 인상 좋은 허풍쟁이 정도로만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뒤죽박죽 엉망이 된 서랍 속에서 그의 흔적 한 점조차 찾을 수 없을 테니, 그는 다만 잊히는 사람이다.


제발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아닌척해도 누구보다 부지런히 꼼지락거리는 나니까.




나른한 오후, 사파호 벤치에서 만났던 자오족 아줌마는 무얼 하며 지낼까.

'우리 동네 탱킴에서 사파까지 오는 길은 무척이나 험함. 팔찌를 열심히 팔아 바퀴가 두툼한 오토바이를 한 대를 사고 싶음. 그래서 말인데…, 네가 팔찌를 하나 사 보는 건 어때?' 처음 만난 날, 그녀가 내게 팔찌와 지갑 같은 온갖 싸구려 기념품을 팔기 위해 했던 말이다. 그녀는 내가 연민에 움직이는 사람인 줄 알았는지, 나를 만날 때마다 앓는 소리를 해댔다.


팔찌를 사느니 망고스틴 1kg을 먹겠다고, 사고 싶지는 않지만 사려 해도 정말 돈이 없다고 자동응답기처럼 답하는 지독한 나의 모습에 결국 그녀는 포기하고 말았다. 그다음부터 우리는 매일 오후 서너 시쯤 만나, 망고스틴을 까먹으며 해가 죽어가는 사파 호수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녀가 운 좋게 외국인 초보 여행자를 물어온 날에는 그 사람이 망고스틴을 샀고, 그렇지 않은 날에는 내가 샀다.


사파를 떠나는 날에도 나는 벤치에 앉아 있었. 뒷목이 햇빛에 뜨끈하게 달궈질 때쯤 그녀도 호수로 왔다. 그녀는 벤치에 앉자마자 불평을 내뱉었다. 키가 멀대같이 큰 프랑스 남자에게 지갑 두어 개를 팔기 직전까지 갔는데, 몽족 여편네가 그 자식을 채갔다는 것이다. 나는 그러게 지갑을 중국에서 떼 오지 말고 직접 만들지 그랬냐고 핀잔을 주며 손에 쥔 비닐봉지 하나를 그녀에게 들이밀었다. 봉투 안에는 망고스틴 5kg이 들어있었다. 그녀는 당황하며 내게 어디서 훔친 것이냐고 물었고, 만약 돈 주고 산 것이라면 그 돈을 날 주지 왜 망고스틴을 사냐고 투정했다. 나는 내일 하노이로 떠날 거라 그냥 한 번 사봤다고, 내가 돈이 없기는 한데 아주 없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녀는 말없이 팔찌 몇 개와 지갑 하나를 내 얼굴 앞으로 들이밀었다. 어차피 팔리지도 않는 거 그냥 다 가지라고 했다. 내가 주머니를 뒤적이며 지폐를 꺼내자 그녀는 됐다고 두어 번 손사래를 치더니 망고스틴 하나를 꺼내먹었다.


나도 말없이 망고스틴 몇 개를 까먹다가 이제 배낭을 싸야 한다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은 망고스틴은 칠등분해서 한 주간 먹으라고 말했다. 적어도 한 주간은 나를 기억해달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녀는 일주일이면 적어도 7kg을 사 왔어야 했다고, 아마 3일째에 모두 썩어버리고 말 거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검보랏빛으로 물든 손을 호수에 집어넣고 휘휘 저으며 피식거렸다. 분명 호수에 손을 넣었는데, 그녀의 마지막 농담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데, 그때 물 온도가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건 물이 지나치게 미지근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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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끝마다 니체와 톨스토이, 셰익스피어 따위의 문장을 재수 없게 들먹이는 아무개가 있어서, 지난 한 달간은 문학 전집을 정독했다. 시작은 열등감 때문이었는데, 읽다 보니 꽤나 재미가 있어서 습관처럼 해온 글쓰기도 까먹고 그저 읽으면서만 시간을 보냈다. 근데 또 읽기만 하다 보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왜 이리 많은지, 쓰지 않고서는 더 이상 읽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오랜만에 브런치에 접속했다.


중간에 생략된 수많은 사람들에 관한 내용은 어차피 별 볼 일 없는 것들이라 여러분들은 읽지 않는 것이, 그리고 나는 쓰지 않는 것이 이롭다. 요약하자면 요즘 밤마다 불을 끄고 궁상맞은 미련을 즐기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그게 참 아리면서도 아름답더라 하는 이야기다.


이 엉뚱한 글을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진즉에 눈치를 챘을 것이다. 그렇다. 의식의 흐름대로 적어낸 아무 의미도 없는 이야기다.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의무감이 들어서 후다닥 몇 줄을 적어봤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잘 다듬어서 완성을 해보고도 싶은데,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다. 나는 그 누구보다 게으르니까. 지금은 에밀리가 파리에서 도대체 무엇을 했는지가 더 궁금하기도 하고, 오랜만에 키보드를 두드리다 보니 손가락이 뻐근하기도 해서 이만 줄인다.


아무 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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