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퇴사 하고 휴지기(갭이어)를 보내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가, 갑자기 일이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 그 생각을 놓쳤다. '아, 어쩌면 여유가 있어서' 그만두고 싶었다는 사념이 올라왔던 것인가. 광선검을 쥐고 젤리 요괴들을 치어내던 안은영* 선생님이 빙의된 듯 일을 치어내고 나니, 육수 빠진 살코기처럼 육신과 정신이 퍽퍽해졌다. 그리고 다시 한숨을 돌리자 휴지기보다 휴가가 시급했다. 다시 육신과 영혼에 물기를 좀 채워야겠어.
*[보건교사 안은영], 정세랑의 소설 속 인물
가야 한다면, 산, 바다, 호수를 모두 볼 수 있는 그곳으로
속초였고, 속초여야만 했다. 속초의 매력을 알려준 이는 이혼과 재결합 사이에 스치듯 만났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합리적인 직장인이었다. 주기적으로 일 때문에 영육이 퍽퍽해져 자연으로부터 감성을 충전한다는 내 얘기를 듣고는, 짧은 휴가 기간 동안 자연이 주는 매력을 다채롭게 즐기는 속초를 추천해 주었다. 그곳은 오래 머물고 싶을 만큼 천천히 음미해야 할 근사한 장소가 지천이었다.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닌 커다란 호수 영랑호와 청초호, 위로는 고성, 아래로는 양양. 반짝이는 흰모래 벌판과 쏴아- 하고 밀려드는 겹겹 파도가 배터리 충전하듯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에너지가 차오르게 했다. 산 좋아하는 사람들은 왜 속초에서 보이는 설악산 울산바위 풍경을 빼놓느냐고 서운해 할 수 있겠다. 네, 바다를 바라보고 섰노라면 등 뒤에 울산바위를 트렌치코트처럼 걸친 느낌을 낼 수 있어요.
"저 폰은 깊은 바다에 가 빠뜨려요"
문득, 영화 <헤어질 결심> 속 사랑고백이 떠 오른다. 산에 가서 잃은 사랑을 바다에서 다시 찾는 이야기라고도 하고, 사랑하는 데는 결심이 필요 없지만, 헤어지는 덴 결심이 필요하다고 했던, 지난해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은 영화. 잠시 놓았던 사랑을 바다에서 다시 이어가려고 그랬던가. 이번 속초 여행에는 전남편이자, 현남친과 동행했다. 속초의 매력을 알려줬던 사람은 딱 거기까지였다. 사람의 마음을 읽었지만 마음이 통하지는 않았던. 그 사람 말대로 나는 속초가 좋았지만 그 사람이 좋아지지는 않았다.
"아무리 바빠도 죽은 업무가 산사람 바람 쐬기를 중단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매년 이 즈음은, 전국이 벚꽃으로 아름답지만 속초도 몇 군데 꽃감상하기 좋은 장소가 있다. 설악산(7번 국도에서 설악산 국립공원 방향으로 난 길가) 남대천 산책로, 공설운동장, 영랑호 주변이 대표적이다. 여행 계획을 세울 때, 매년 4월에 벚꽃을 보려 속초를 찾는 사람들도 꽤 있다고 하니, 많은 인파는 피해야겠다 싶었다. 아쉽지만 벚꽃의 절정은 피하자는 것이 우리의 결론. 네이버 지역별 개화시기를 검색해 보니, 속초는 4월 3~4일 즈음이었다. 그러면 그 앞 주말에 방문하자. "아무리 바빠도 죽은 업무가 산사람 바람 쐬기를 중단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늦된 사람처럼, 뒤늦게 마니아가 되어버린 '헤어질 결심'의 대사를 속절없이 패러디하며 그렇게 떠났다.
또 하나의 여행 목적, 필름 카메라 사진 촬영
디지털카메라를 처음 선물 받은 것은 2003년, 미놀타 XT 똑딱이였다. 그것이 나의 첫 '디카'였다. 작은 손에도 한 손 그립이 가능한 토이 사이즈의 카메라로 담아내는 과정이 간편하고, 결과물은 현재 시점에서는 그리 완성도 높지 않지만, 당시에는 그저 사랑스러웠다. 나는 바로 사진에 매료되었다. 새로운 대안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 똑딱이 카메라로 기록했다. 용량이 적어 몇 장 찍을 수도 없었지만. 그전에는 내 카메라를 가진 적이 없었다. 집안에 하나 있는 오토매틱 필름 카메라는 고장난지 오래였다. 우리 가족은 사진을 잘 찍지 않았다. 어렸을 때, 소풍이나 운동회, 생일파티 때 몇 장 찍었던 기억이 있긴 한데, 언제부턴가 모래알처럼 각자의 세계에서 서걱거렸고, 서로가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서 포즈를 취할 일은 생기지 않았다.
한동안은 똑딱이가 담아내는 세상에 불만이 없었다. 불만은 성질만 버린다. 사진은 돈이 꽤 드는 취미였다. 소위 장비발이 서야 좋은 사진이 나오는데, 장비를 갖추려면 어느 정도 재력이 뒷받침이 되어야 했다. 당시 성능 좋은 DSLR들은 꽤 고가의 것들이었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 간신히 대학원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나에게는 더욱 사치였고. 한동안은 사진은 완전히 접었다. 그러다 대학원 졸업하고 취직해 첫 월급으로 스스로에게 준 선물이 니콘 DSLR D300이었나, 뭐 그렇다. 지금은 스마트폰 카메라 렌즈 기능이 워낙 뛰어나고 휴대성과 일상성이 좋아 DSLR 마저 사양길로 접어든 지 오래되었다. 나도 그 뒤로 DSLR 카메라를 잡은 적은 거의 없다. 기록, 기념, 기억해야할 일은 '폰카'로 즉석에서 해결했다. SNS에도 진심이 아니라 좋은 카메라로 멋진 사진을 찍겠다는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오래 일하기 위해서 체력만큼 필요했던 감성 채우기
성장과 네트워킹에 진심인 직장인 커뮤니티에서필름 카메라 사진 소모임(클럽)에 가입했다. 답답한 직장생활에 숨구멍을 좀 내고 싶었다. 누구는 산소호흡기라고 했지만. 결국 갭이어도, 직장 외 네트워크와 역량을 위한 스터디도 더 오래 일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회피보다는 더 끌어안는 쪽이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대부분 오래 일하기 위해서 체력 관리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맞는 말씀이다. 체력, 건강이 가장 기본기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 하고 싶은 건 감성케어. 프리랜서든, 자영업자든, 근로소득자이든, 자신이 지키고 있는 '나다움'의 영역은 지구의 핵처럼, 나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 나는 그것이 자기 콘텐츠가 되고, 미래로 이어지는 자양분이 될 거라고 본다. 과거에 거쳐왔던 공부, 관계, 일들이 지금 생각해 보면 버릴 게 없다. 어떻게든 연결이 되더라. 그리고 그 중심에는 늘 '나다움'에 대한 탐구가 있었다. 그게 나는 요즘 사진으로 감성 채우기다. 시작조차 해 보지 못했던 '과거의 매료점'에서 찾았다. 사진을 찍어보고 싶다. 늘 쉽게 찍고 지우는 스마트폰 디지털 사진 말고, 장롱 속에 처박혀 있다, 이사할 때 버려졌던 그 필름카메라로.
기억 벽장 깊은 곳에서 한 장면을 찾아냈다. 삼촌이 남대문에서 오퍼상(지금 생각해 보면 일제 전자제품을 병행수입하여 판매하던 일이 아니었던가 싶다)을 하던 친구가 자랑스럽게 대사를 읊는다. '카메라는 일제, 그중에서도 캐논이 최고래. 우리 삼촌이 다음 방학 때 사다 준댔어!'
그 때 그 시절, 돈이 있어도 쉽게 구할 수 없는 80년대 최고의 일제 카메라가 지금은 당근마켓에서 20만 원 안팎에 거래 되고 있었다. '[가격내림]' 머리말이 붙은 게시글을 보고 클릭했다. '생활 기스, 사용감이 좀 있지만, 작동 잘 됩니다. 최근에 배터리도 교체하였습니다. 취미로 한동안 찍다가 잘 사용 안 하게 되어 당근 합니다'. 설명 그대로 '생활 기스, 사용감'이 있지만 작동이 잘 되는, 78년생 빈티지 반자동카메라 cannon a-1을 당근으로 구입했다. 내 카메라가 된 뒤로는 '생활 기스, 사용감'은 '빈티지한 멋'이 되었다. 콩깍지가 쓰이면 똑바로 보려 해도, 예뻐 보이기만 하는 것처럼.
결론은 벚꽃 명소, 영랑호에서 채워 온 감성, 필름사진
필름 사진의 감성을 나누고자 시작한 글이 중언부언 길어졌습니다. 결론은 이 사진을 업로드하기 위함이었어요
^ㅡㅡㅡ^. 콩깍지 쓰인 사람에게는 컴컴하게만 나온 사진도 예뻐 보이고, 흔들린 사진도 예뻐 보이나 봅니다. 잘 찍었다고 멋있다고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지친 나를 이렇게 채우고, 세우며 사는 일상을 나누기 위함이었다고. 구구절절 사족을 붙이며 영랑호의 벚꽃 사진을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