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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림 May 19. 2023

한 잔은 공짜, 두 잔은 더블

글쓰는 직장인


모든 시작이 훌륭하고 완벽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뭐든 시작해야 훌륭하고 완벽하게 해낼 수 있다. 서른이 되기 전까지 어떤 것들은 시도조차 해 보지 않았다. 운전, 번지점프, 패러글라이딩, 경비행기 타기, 외줄 타기, 스쿠버다이빙, 코세척, 위스키 마시기, 그리고 한 직장에 정착하기. 다른 일들은 잘못하면 큰 사고로 이어져 죽음에 이를 확률이 높아 서라 하지만 위스키는 왜? 취업은 왜? 위스키는 독할 거 같았고, 취업은 어려웠다. 그러나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고, 아무것도 맛볼 수 없다. 나는 작은 지방 도시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그곳에서 다녔다. 스무 살 전까지 다른 도시, 나라에 살아 본 적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야 부모님 품을 벗어나 서울에서 쭈욱 살았고 중간에 몇 년은 호주에서도 살아 보았다.


호주에 처음 도착한 도시는 변덕스러운 날씨로 유명하지만 도시 경관이 아름다워, '호주 속의 유럽'이라 불리는 멜버른이었다. 야라강의 야경에 반해 눈빛이 아련해지다가도 한 여름에도 서리가 내리는 날씨에는 몸서리가 쳐졌다. 한낮에는 민소매와 반바지로도 더웠지만 밤이 오면 패딩을 꺼내 입을 정도였다. 어느 날인가는 마음까지 시려, 이 나이 먹고 비행거리로 10시간 떨어진 이 남반구에서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나는 이미 이곳이고 불평만 하고 있기엔 비행기 값도, 청춘도 아까웠다. 이럴 때는 문화 탐방을 빙자하여 시린 마음과 몸을 녹이기에 딱 좋은 알코올을 주입해야지.


그렇게 퀸즈 스트릿 뒷골목에 위치한 낡은 칵테일 바에 들어갔다. 바 bar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주류리스트에서 발견했던 특이한 칵테일 이름만큼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a runny nose(어 러니 노즈, 흐르는 콧물) 'a runny rose' 같은 시적 표현을 쓰려다 오타가 난 게 아닐까 잠깐 의구심을 품었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특이하지? 위스키 베이스 칵테일인데 콧물감기도 뚝 떨어지게 하는 맛이지"

망설이는 내 생각을 읽었나, 수염이 덥수룩한 바텐더가 무심하게 권했다. 허름한 싸구려 바에 어울리는 칵테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아무래도 이름만 들어서는 비위가 상해 선뜻 시도를 못했다. 머뭇거리고 있는 나에게 바텐더는 다시 권했다.

"첫 잔은 서비스, 대신 두 번째 잔은 더블. 첫 잔만 마시면, 공짜니까, 그렇게 나쁜 거래도 아니잖아."

꽤 설득력 있었다. 밑져야 본전이다. 첫 잔이 별로라면 거기서 멈추면 된다. '정말 자신 있으니까 저렇게 권하는 거겠지.'

"좋아. 첫 잔 공짜라고 했다. 흡!"


여기까지 왔으니, 술 한 잔 시도해 보는 것쯤은. 다음날 월드뉴스 사건사고란에 '아시아계 여성, 모 바 bar에서 살해당해' 같은 제목의 기사에 실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올라왔지만 일단은 술잔에 혀 끝을 대 보았다. 혀 끝에 감도는 쌉싸름한 맛이 나쁘지 않았다. 독은 안 탄 거 같으니, 세 번의 깔짝거림 끝에 한 모금 꿀꺽 삼켜 보았다. 목구멍 안쪽으로 40도가 넘는 액체가 꿀렁, 흘러갔다. 뜨끈한 열기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게 느껴진다. 후우, 숨을 내쉬고 아찔한 정신을 세우려 머리를 흔들었다. 혹시 '마약' 같은 약물이 들어 있을까, 끝까지 의심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셨다. 내 뇌는 순식간에 '달콤 쌉싸름하면서도 바닐라의 풍미가 진한 흐르는 콧물'에 감탄하고 있었으니까. 잔을 내려놓고 바텐더를 바라보니 어깨를 으쓱하며,  엄지와 검지로 자기 콧수염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어때 꽤 괜찮지?"

혈관을 타고 흐르는 알코올에 여유가 생긴 나는,

"이름을 드래건 화이어(dragon fire)로 짓는 건 어때?"

그는 이방인의 제안에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그날 '한 잔 더' 주문했고 바텐더가 애초에 제시한 계산법 대로 두 잔 가격을 지불했다. 계산하고 나가며 물어보았다. 진짜 '한 잔은 공짜, 두 잔은 더블 마케팅'을 하고 있냐고. 그건 아니라고 했다. 망설이는 고객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작은 즉석 제안'을  본 것이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발 내디뎌 미지의 경험을 수용하기를 잘했다.






호주에서 돌아와 본격적으로 취업을 준비했다. 지인의 추천으로 지금 회사에 경력직 지원 서류를 제출했고,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최종 면접은 임원과의 티타임 형식이었다.

그날따라 늦지 않기 위해 택시를 탔으나 도로는 막혔고, 이대로 택시 안에 있다가는 여지없이 늦을 것 같아 지하철역 한 개 구간을 정신없이 뛰어, 간신히 제시간에 회사 정문까지는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건물 입구에서 안내를 받고 올라가며 시간이 지체되어 결국은 5분을 지각하고 말았다.

자리에 자, 면접관은 준비된 차를 권했다. 투명한 에메랄드 빛 녹차에서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뛰어오느라 팽창한 폐에서 조금씩 바람을 빼면서 뜨거운 차를 마셔야 했던 그 곤혹스러운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뒷목이 뜨끈해진다. 신중하지만 너무 느리지 않은 속도로 막 상체를 숙여 조심스럽게 찻잔을 감싸 쥔 찰나, 질문이 떨어졌다.


'싱글 몰트 위스키를 아나요?' 지각이라는 낭패감을 지우지 못했는데 위스키라니, 움츠러드는 어깨를 간신히 직각으로 세웠다.

"하루키의 에세이에서 읽은 적이 있지만 마셔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보다 위스키라면 특별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위기에 직면하면 본능적으로 자구책을 마련한다. 기억 저편에서 멜버른 퀸즈 스트릿 뒷골목의 낡고 허름한 바가 떠올랐고, 콧수염 바텐더가 권하던  칵테일 '어 러니 노즈(흐르는 콧물)' 눈앞에 어른거렸다. 낯설고 기괴한 이름이었지만 바텐더가 제시한 '첫 잔은 공짜, 두 잔은 더블' 마케팅 능력에 감탄했던 그때. 공짜에 호응하는 사람의 심리를 파고든 동시에, 그만큼 고객의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느꼈노라고. 우리 삶에는 무수히 많은 '하찮고 작은 전략과 협상'이 교차한다. 그 결과 새로운 경험이 쌓이고 그것이 실망스럽든, 만족스럽든, 그 만의 고유한 의미를 남긴다. 나는 그때 '위스키'에 대한 내 마음의 장벽을 넘었다고. 지금 알아차렸다고 답변을 이어갔다. 그때부터 위스키는 더이상 독하다는 관념에 갇힌 술이 아니었다.


면접관의 입에서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스치고 지나간 수많은 순간 속에도 공들여 생각하면 그만한 가치와 메시지가 숨어 있죠.' 정확한 단어까지 기억나진 않지만 면접관은 내 이야기를 인상 깊게 들었다고 호응해 주었다. 그 외에 질문이 더 어졌고, 위스키 이야기로 긴장감이 풀린 나는 그 기운으로 면접을 안정적으로 마쳤다. 


면접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러 싱글몰트 위스키 관련 책을 찾아보고 기회가 되면 마셔보리라 다짐을 했다. 면접에는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질문자의 의도에는 벗어난 답변이었을 것이라 분석하며.


그 뒤로 십 년에 더해 몇 년이 더 흘렀고,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나는 그 회사에 운 좋게 입사하여 잘 다니고 있고, 위스키도 다양하게 즐기게 되었다. 칵테일 형태에서 온 더락, 스트레이트로. 맛은 싱글 몰트보다 블렌디드 쪽이 좋다. 커피도 싱글오리진 보다는 바리스타의 취향을 담아 블렌딩 한 쪽을 선호한다. 누군가 맛과 향, 분위기를 고려하여 잘 조율해 놓은 쪽을 좋아한다. 그럼에도 특별한 위스키를 꼽으라면 싱글 몰트 위스키 쪽이다. 


잊지 못할 그 질문이 있었기에. 화장품 회사 면접에 위스키 질문을 받을 거라고는 예상도 못했고, 그중에도 싱글몰트 위스키에 대해서는 더더욱 몰랐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중요한 건 싱글몰트 위스키 자체는 아니었다. 당시 면접관이었던 임원이 얼마 뒤, 퇴사하여 직접 물어보지 못했지만 그분의 의도는 돌발상황에도 '쫄지 않고 대처할 역량과 기지가 있는가'를 테스트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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